1949년 태어나 한국전쟁 이후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며 성장기를 보낸 SPC그룹 허영인 회장은 운명적으로 제빵산업과 만났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즐기며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허영인 회장은 타고난 운명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빵을 좋아하고, 빵 만들기를 즐겼다.
허영인 회장은 학창시절부터 밤이면 생산현장에서 밀가루 반죽이 고소한 빵으로 만들어지는 공정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다.
대학에 가서 가장 먼저 아버지 고 허창성 회장에게 조른 것은 중고승용차 구입이었다.
몇 달이 지나 아버지가 차를 타고 무엇을 했느냐 물었을 때 허영인 회장은 "서울 곳곳을 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다"며 그간 모았던 시장조사 자료를 한 상자 분량으로 만들어 부친에게 보여드렸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들의 행동에 부친은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또한 허영인 회장의 빵에 대한 전문성은 미국 제빵학교를 수료하면서 터득한 이론과 기술에서 더욱 깊이를 더해 갔다.
평소 "최고경영자는 경영 마인드만으로는 부족하며 기술 마인드, 즉 엔지니어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허영인 회장의 신념이 SPC품질경영의 기본이다.
수시로 생산현장을 누비고, 수십 명의 석ㆍ박사로 구성된 식품기술 연구소 직원들도 원료부터 시작해 완제품의 모양이나, 향기에 이르는 허영인 회장의 세세한 지적 앞에 진땀을 흘리곤 한다.
◇변화의 시작 샤니의 탄생
SPC그룹은 1945년 창업주 초당 허창성 명예회장이 고향인 황해도 옹진에서 문을 연 상미당(賞美堂)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48년 서울로 옮겨 연료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한 무연탄 가마를 개발해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1959년에 사명을 삼립제과공사로 바꾸고 용산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후 1963년 서울 신대방동에 공장을 마련해 제과제빵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어 1968년 삼립식품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1970년대 들어 국내 100대 기업 반열에 올랐다. 1975년에는 기업공개를 단행해 국민기업으로 거듭 태어났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정책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1970년을 기점으로 소비자들은 맛있고 질 좋은 빵을 찾기 시작했다.
고급 케익류의 수요도 늘어 1960년 말부터 고려당, 태극당, 뉴욕제과 등 윈도우 베이커리들이 점차 제과제빵업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빵업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삼립식품은 1971년 광주공장을 준공해 이를 중심으로 고급 케익을 생산판매하는 한국인터내셔날식품㈜(샤니의 전신) 설립했다.
샤니는 당시 고급제과점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제품을 대규모로 생산판매함으로써 고급제빵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이로써 고급 베이커리의 대중화를 이룬 국내 업계 선두 회사로 발돋움한 것이다.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도입과 프랑스풍 고급 베이커리 파리크라상 설립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외식산업의 다변화를 예상한 허영인 회장은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1985년 세계적인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배스킨라빈스를 도입했다.
프랜차이즈 방식에 의한 아이스크림 시장은 당시로서는 전혀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았으나, 허영인 회장이 그 성장 잠재력을 예견하고 선점한 것이다.
또한 1980년대 들어서면서 소비자 취향의 고급화에 맞춰 신선한 이미지의 제과점(윈도우베이커리) 형태가 제빵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갔다.
이와 더불어 SPC그룹은 1976년 명동에 샤니의 집을, 1984년 후레쉬나를 베이커리 점포로 런칭했다.
샤니의 집이 완제품 중심의 진열 판매에 가까웠다면, 후레쉬나는 오늘의 파리바게뜨와 같이 매장에서 직접 구워 파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나아가 후레쉬나 이상의 고급한 브랜드 전략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1986년에 프랑스풍 정통 고급 빵을 즉석에서 구워내 고객에게 제공하는 파리크라상을 서울 강남구 반포동에 개점했다.
또한 1988년에는 파리바게뜨를 광화문에 가맹점으로 개점해 격조 높은 프랑스풍의 맛과 분위기로 갓 구워낸 신선하고 다양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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