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픽사베이)

[뉴스인] 고선윤 논설위원 = 전공을 선택할 때, 내가 얼마나 잘 공부할 수 있는 분야인가를 사전에 알기란 쉽지가 않다. 나는 대하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역사학과를 지망했다. 그리고 대하드라마는 역사보다 문학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F가 박힌 성적표를 가지고 있지만 무사히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인생은 참 모르는 일이다. A+도 있고 장학금도 받았으니 뒤늦게 전공을 제대로 선택한 것 같다. 아니 내가 알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답인지도 모르겠다.

학위 받은 걸로 주절거리면서 돈벌이도 하고 있는데, 동창회에서 학과 창립 40주년 동문회보를 만든다고 출판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나를 찾았다. 동문들의 글을 올리고 색이 바랜 사진을 찾아서 자리 앉히는 일을 하면서 나에게 캡션을 만들란다.

설악산인지 지리산인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스무여 명이 모여서 찍은 사진에 ‘아름다운 우리의 청춘 기억 속으로’ 이런 멋진 글을 달았더니, 아니다 하면서 선배가 직접 적기 시작했다. ‘1984년 10월 23일 지리산’이라고 확인하고 정확히 적은 다음 ‘첫 째줄 왼쪽부터 ○○○(××학번)’이라고 하나하나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과 학번의 사람에 대해서는 비슷한 학번의 사람을 찾아서 일일이 전화하고 확인했다. 이 작업만으로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세계사 강사로 이름을 날리는 후배가 “그런데 누나, 일본은 어떻게 전쟁에 지고도 천황이 존속하는 거지요?”라고 묻는다. “나한테 묻는 거야? 네가 더 잘 아는 거 아니니.” 역사니 문학이니 하기 전에 나는 일본을 공부한 사람인데 이런 건 멋지게 설명해 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대상이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 빠짝 긴장이 되기는 하지만.

◇ 일본에는 왜 천황이 존속할까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서 일본의 패전을 국민에게 알렸다. 그래도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 부대도 있었다. 가나가와 현의 아쓰키(厚木) 기지에서는 항공기 200기 이상을 가진 부대가 항전을 외쳤다. 각자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기세였지만 일본정부의 필사적인 설득으로 8월 20일에야 무장해제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에게 점령되었다.

8월 30일 아쓰키 비행장에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태운 특별기가 착륙했다. 며칠 전까지 항전을 외치던 부대가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사람이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물고 여유롭게 그리고 당당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우리도 잘 아는 장면이다.

당시 그는 대통령후보로도 거론될 정도로 미국에서는 이미 영웅이었다. 미국 필리핀 총독을 역임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다. 일본패전과 함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수행하는 권한을 얻었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맥아더는 이 순간의 자신의 모습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기자들에게 “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말이 아닌 영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맥아더 일행은 숙박지인 요코하마 뉴그랜드 호텔로 이동했는데, 24km에 걸친 길에는 일정 간격으로 일본헌병이 서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맥아더를 호위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다. 일본정부는 점령군에 대해서 협조적이었다. 같은 날 요코스카 앞바다에는 미국 해병대 제1진 1만3000만 명이 상륙했다. 일본점령이 시작된 것이다.

3일 후, 9월 2일 동경만의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을 대표해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이어서 맥아더와 연합군 대표 8명이 조인.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 종결되었다.

이날 재미난 일화가 있다. 맥아더는 1853년 페리가 일본에 와서 개항을 요구할 때 흑선에 걸려있던 성조기를 일부러 준비해 왔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92년 전 동포 페리 제독하고 닮은 모습으로 동경만에 있다. 페리제독의 목적은 일본에 지혜와 진보의 시대를 안겨주고 고독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었다.”

당초 미국정부는 일본에 군사정권을 둘 생각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군사정치훈련을 받은 부대가 언제라도 일본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정부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입법・행정・사법 3권을 모두 쥐고 일본을 직접 통치할 것을 계획했었다. 9월 8일 점령군은 요코하마에서 도쿄에 진주, 총사령부 본부를 궁 옆으로 이전했다. 9월 11일 총사령부는 사전 예고 없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37명을 전쟁범죄인으로 체포했다.

일본정부는 천황도 전범자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사실 미국과 연합국은 천황에 대해서 전쟁책임을 추궁하자는 여론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9월 10일 천황을 전쟁범죄인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정부정책 결의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소련과 호주도 강경하게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려 했다.  

그런데 조인 다음날 9월 3일, 시게미쓰 외부대신은 맥아더를 방문하고 “총사령부가 직접 통치하면 국민은 혼란스럽다. 정책실행은 일본정부를 통해서 실행하기 바란다”는 요청을 했을 때 맥아더는 “나는 일본을 파괴하고 국민을 노예로 할 생각은 없다. 정부와 국민의 태도에 따라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면서 일본정부가 협력하는 한 일본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맥아더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맥아더는 군사보좌관 보나 펠라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군과 천황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인데, “천황은 일본인 정신의 구심점이므로 일본 점령통치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진언을 했다.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정부는 맥아더에 대해서 대단히 협력적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점령군에게 협력하라는 천황의 명령이 큰 영향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 맥아더 자신도 천황제를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을 통치하는데 천황제를 통해서 통치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힘들다고 생각했다. 단 천황이라는 인물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국에서는 천황을 빨리 소환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였다. 맥아더는 스스로 일본의 무사도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었다. 무사도에서는 체면이 중요하므로, 그래서 기다렸던 것이다. 천황을 억지로 소환한다는 사실은 국민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니 이것은 피하고 싶었다. 

◇ 미일관계의 원형을 만들다

천황은 요시다 외무대신을 불러 맥아더를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고 9월 27일 역사적 만남의 시간이 마련되었다. 맥아더는 천황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거나 곤란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만남의 장소를 미국대사관저로 정했다. 체면을 생각해서 사적 방문형식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천황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해양생물학의 권위자라는 사실, 담배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9월 27일 오전 9시 50분 천황을 태운 자동차가 극비리에 미대사관을 향해 출발했다. 실크모닝코트 차림 대단히 굳은 표정이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후는 슬픈 표정으로 배웅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사실상 살이 빠질 정도의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각오를 하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본의 미래, 자신, 가족 그리고 왕족의 운명을 지고 있었다. 

오전 10시 대사관저 문을 통과했다. 현관에는 부관 2명이 마중 나왔다. 맥아더는 마중도 배웅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천황은 동행한 일행과 현관에서 헤어지고 맥아더가 기다리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맥아더가 담배를 권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여드리는데 천황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천황은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국민이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 정치와 군사 측면에서 모든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자로서 나 자신을 당신을 대표로 하는 연합국의 판단에 맡기고자 방문했다”는 천황의 말에 맥아더는 그 순간 자신의 앞에 있는 천황이 일본 최고의 신사라는 사실을 느꼈다고 전한다. 

천황의 이 말은 이전부터 가진 생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천황은 내대신 기토 고이치(木戸幸一)에게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퇴위해서 진정시킬 수는 없는 일일까”라고 했던 기록이 있다. 

회견은 예정시간을 넘기고 진행되었다. 35분에 걸친 회견이 끝나고 맥아더의 천황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예정을 바꾸고 천황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최대의 호의였다. 신문은 일제히 천황과 맥아더 회견을 보도했다.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여유롭게 허리에 손을 올린 노타이 맥아더와 모닝코트 차림으로 직립부동자세의 천황의 사진은 일본이 패전국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후에도 만남이 있었다. 모두 11번의 만남이었다. 회견의 내용은 좀처럼 알 수 없는데 천황이 “이제 퇴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퇴위해야 할까”라고 말하면, 맥아더는 “아니다 당신은 퇴위해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천황은 맥아더에게 마음을 기대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 같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맥아더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한 적이 있는 작가 구도 미요코(工藤美代子)의 말로 마무리 하겠다. 그래서 일본에는 지금도 천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통치하고 싶었고, 천황은 맥아더와 잘 지내고 싶었다. 다행히 서로에 대한 느낌이 좋았다. 천황과 맥아더의 제1 회담이 미일관계의 원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후 미일의 좋은 관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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