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김기선이 지난 14일 감성토크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뉴스인] 고선윤 논설위원 = 예술의 전당에서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한 건물 지하에 ‘ROYAL ART HALL’(대표 장재영)이 있다. 장맛비가 그치지 않은 지난 14일 오후 ‘테너 김기선의 감성 토크 콘서트’에 초대 받았다. 이날 토크 콘서트에는 일본에서 두 가수가 초빙되었다. 이름이 토크 콘서트인지라 노래만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을 것이니 나도 뭔가 작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리였다.

50개의 의자가 마련된 작은 홀은 바깥의 꿉꿉한 세상과는 다른 아늑함이 있었다. 음악이라고 내가 아는 게 뭐가 있겠는가. 몇 해 전 ‘3일만에 읽는 클래식’(서울문화사)이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는데,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참으로 좋은 책”이라는 칭찬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구절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역자의 음악에 대한 소양부족.” 뭘 더 말하겠는가.

테너 김기선의 오스트리아 유학. 어려웠던 시절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할머니 한분이 다가와서 “젊은이는 목소리가 아주 좋은데 왜 거리에서 노래하고 있나?”고 물었고, 자신의 남편이 오페라 지휘자니 오디션을 받으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것만으로도 이날의 토크 콘서트는 무궁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6개월 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을 맡았고, 급기야 오페라의 주역으로 유럽을 사로잡았으며, 세계 속의 한국을 빛낸 젊은 음악가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일본에서 온 테너 미즈후네(오른쪽)와 고선윤 논설위원

한 곡을 부르고는 관객들과 눈빛을 교환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특별한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온 테너 미즈후네 게이타로(水船桂太郎)와 그 부인 소프라노 오하라 가즈키(大原一姬)도 노래를 하고 김기선과의 만남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관객들과 하나가 되었다.

김기선이 체코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미즈후네 부부 역시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사사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인은 “우린 남편은 영어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김기선과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통화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미즈후네 역시 “나는 한국이 참 좋고, 한국 사람처럼 생겨서 어제는 한국 사람인양 거리를 활보했는데 일본말로 호객행위를 당해서 당황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소프라노 오하라 가즈키(오른쪽)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20분이라는 긴 인터미션을 가졌다. 홀 밖에 준비한 풍요로운 와인과 다과를 즐기면서 50여명의 관객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서로 말을 섞었다. 즐거웠다. 음악과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술에 취했으니 더 좋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겠다”는 누군가의 말과 함께 다시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 부인 오하라 가즈키의 친구가 우리의 ‘아리랑’과 일본 동요 ‘아카돈보(고추잠자리)’를 가지고 만든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카돈보’는 저녁노을이 질 때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를 보고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향수 짙은 노래다.  

"저녁노을 질 무렵 고추잠자리, 누군가의 등에 엎여서 본 것은 언제이었던가.
산밭에서 뽕나무 열매를 작은 바구니에 담은 것은 환상인가.
열다섯에 누나는 시집가고 연락이 끊어졌는데,
저녁노을 질 때 고추잠자리 앉아있다 장대 끝에."

아리랑을 부르고 아카돈보를 부르고 어느새 두 개의 곡을 같이 부르는데 전혀 다른 두 개의 곡이 아니라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하나의 곡’으로 훌륭하게 소화되고 있었다. 아리랑이 들리고 살짝살짝 일본어가 들리고,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만남이 이렇게 아름답게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어쩌면 서로 다른 두 개의 만남이라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일본말이 들리니 그렇다고 치고,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단지 소리로만 들리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이었던 모양이다. 옆자리의 노신사도 손수건을 꺼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거리를 두고 서먹서먹한 이야기만 만들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나 같이 일본을 공부하고 학생을 지도하는 사람은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콘서트홀에서는 두 나라가 이렇게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다. 멀리 타국 땅, 지구 뒤편에서 동양의 성악가는 만났고, 그 만남은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나가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젖게 하고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미즈후네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테너 김기선과 나, 바리톤 석상근 그리고 일본에 있는 나의 절친 바리톤 등 네 사람이 하나의 팀을 이뤄 공연하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무대에서.” 이날 늦게까지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바리톤 석상근에게 이런 추파를 던졌고, 옆자리의 사업가 한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적극 후원하겠다고 했다. 미즈후네의 꿈은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의 꿈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이 꿈이 이 자리 사람들만의 꿈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작은 마중물이 되기를….

키워드

#N
저작권자 © 뉴스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