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살인마’ 벨기에 레오폴 2세

생고무 농장 등에서 노역 했던 콩고인

[뉴스인] 이휘성 객원기자 = 대개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홀로코스트나 중국의 대약진에 대해서는 알아도 100년 전 아프리카 땅에 있었던 무시무시한 사건을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콩고 독립국’이라는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잔악한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콩고, 벨기에 레오폴 2세가 농락한 나라

19세기에 유럽 나라들은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위해 경쟁을 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회의가 진행됐다.

아프리카는 유럽 각 나라들의 식민지가 됐는데, 이 대륙 남부에 위치한 콩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콩고는 어떤 나라의 식민지가 아니라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즉, 콩고는 벨기에가 아니라 레오폴 2세가 직접 다스리게 됐다. 이 정권을 보면 인간 마음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 어떤지를 생각하게 된다.

손이 잘린 한 콩고 어린이

국왕은 자신의 새로운 토지를 거대한 노역 수용소로 만들었다. 모든 콩고인들은 왕을 위해 생고무 농장 등에서 노역을 해야 했다. 만일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시자는 그 사람의 손을 잘랐다. 콩고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손이 잘린 콩고의 소년 소녀 사진들이 이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항쟁을 탄압할 목적으로 레오폴의 공안군(Force publique)은 콩고 마을을 급습해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콩고에서 나온 모든 자원은 국왕의 재산이 됐고, 왕은 콩고의 교육이나 의료 등에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

콩고에서 사망자 수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즉 국왕의 명령으로 콩고인 절반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레오폴은 콩고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한 군사 고문관은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놈들의 손을 자른다고 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과인(寡人)이라면 놈들의 몸 전체를 조각으로 자르겠지.”

하지만 국왕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 언론에서의 투쟁

에드먼드 모렐은 1873년에 태어났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 어머니를 둔 그는 어릴 때부터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1891년 그는 벨기에와 협력하는 ‘엘더 뎀스터(Elder Dempster)’라는 회사에 서기로 입사했다.

벨기에 측이 제출하는 문서를 통해 에드먼드 모렐은 콩고로 가는 배들에 주로 무기, 탄약, 사슬 등이 적재되고, 반대로 콩고에서 벨기에로 가는 배에는 생고무, 상아 등 자연 자원이 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때 에드먼드 모렐은 레오폴 2세가 콩고에서 노예 제도를 복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콩고의 상황을 눈치 챈 유럽인은 모렐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레오폴 국왕의 잔악한 정책을 국제 사회에 알려주는 선교사와 식민지 관료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모렐은 언론 캠페인을 시작했고, 여론은 변화하게 되었다.

모렐의 칼럼들이 언론에 나오면서 그는 사실상 항쟁 지도자가 되었다. 1903년 영국 서민원은 레오폴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원주민을 사람답게 다스려야 한다”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때 레오폴 2세 국왕은 처음으로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혹시 영국이나 다른 유럽 나라가 그에게 거대한 이득을 주는 콩고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국왕은 언론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뇌물을 주면서 콩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레오폴 국왕은 문명화된 군주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쓰도록 지시했다.

콩고를 소유하며 1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 마침내 승리

언론 싸움은 수 년 간 진행되었다. 거짓 기사는 국왕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거짓은 역시 거짓이었다. 모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게 되었다.

언론의 압박을 느낀 국왕은 벨기에인, 스위스인, 이탈리아인으로 임명한 특별검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물론 그는 위원회가 “전하께서는 완전히 무죄, 모렐의 고발은 조작에 불과”라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를 희망했지만, 특검은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위원회는 조사를 마무리하고 모렐의 주장과 동일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왕은 이제 최후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벨기에 국회는 공식적으로 콩고를 벨기에로 이송할 것을 요구했고, 레오폴 2세는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결국 1억1100만 프랑크의 배상금과 자신이 건설한 프로젝트에 대해 4550만 프랑크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받은 왕은 1908년 11월15일 콩고를 벨기에에 내줬다. 새로운 당국은 즉시 개혁을 실행했고, 콩고는 거대한 노역 수용소에서 비교적 정상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벨기에 소도시 아를롱에 건립된 레오폴 2세 국왕 동상에는 "콩고 사업은 문명의 이익과 벨기에 국익을 위해 시작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 그리고 패배

콩고의 도살자 레오폴 2세가 사망한지 100년이 넘었다. 지금 세상은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르고, 벨기에 역시 식민지가 하나도 없는 서유럽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레오폴 2세라는 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벨기에 당국은 레오폴 2세를 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를 ‘건설자 왕’으로 부르며, 브뤼셀에 그가 건설한 멋있는 건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강조한다. 2007년에는 레오폴의 초상화를 포함한 유로 동전도 나왔다.

물론 벨기에만 독재자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진시황제 동상,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러시아의 레닌 영묘, 미국 노예제도를 옹위한 존 칼훈 부통령 동상 등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폭군의 범죄를 찬양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벨기에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이 나라의 아를롱이라는 소도시에는 레오폴 2세의 동상이 있고, 동상에는 “과인은 콩고의 사업을 문명의 이익과 벨기에 국익을 위해 시작하였다. 레오폴 2세”라는 문구가 있다.

우리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살인마에게 만세를 부르고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을 조롱하는 것을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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