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화폐로 보는 세계사 속 숨은 이야기

*알파고 시나씨(Alpago Şinasi) 하베르코레(Haber Kore) 편집장이 세계 각국 화폐 속에 담긴 그림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뉴스인(NEWSIN)에 연재한다. 터키에서 태어난 알파고 기자는 지난 2004년 한국으로 유학 와 충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터키 지한(Cihan)통신사 한국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2016)가 있다. 지난 9월에는 대학로에서 '한국생활백서'로 스탠딩코미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편집자주

500페소 앞면에 나와 있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그가 그린 작품 'Desnudo con Alcatraces'(누드와 칼라릴리)

[뉴스인] 알파고 시나씨 기자 = 각국 화폐들 중 가장 기묘한 인물들의 사진이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멕시코 500페소가 아닐까 싶다. 500페소 앞면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뒷면의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미술사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화가들이며 부부다.

화폐에 화가들이 소개돼 있으니 500페소를 통해서는 미술이나 예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필자는 이 부부의 이념적인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이 두 화가의 삶에서는 미술적인 면보다 부부 관계나 정치적인 활동이 더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필자가 아는 화가 중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를 제외하고 가장 독특한 인물인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달리보다 더 독특할 수도 있다. 달리처럼 진보적인 성향이 뚜렷한 리베라는 멕시코 공산당에 정식 가입한 당원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우파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와 달리가 문제없이 지냈듯 리베라는 자본가들과 매우 잘 지냈다. 공산주의자라고 하기에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생활을 했던 그는 미국에 있는 록펠러센터에 벽화를 그릴 정도로 자본가들과 사이가 좋았다.

리베라의 또 다른 기이한 면은 로맨스와 불륜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부인인 프리다 칼로를 옆에 두고 끊임없이 외도를 했다. 심지어 칼로의 여동생과도 로맨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종교적 신앙처럼 사랑한 칼로는 리베라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했다.

리베라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달리처럼 20세기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다. 그중에서도 리베라는 벽화 그림 즉, 프레스코화(fresco畵)로 유명해졌다. 그는 멕시코 구석구석에서 프레스코화를 통해 아즈텍(Aztec)족을 비롯해 메소아메리카 민족들이 어떻게 스페인군에게 약탈당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항상 평등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 상징적 코드를 사용했다. 형태와 색채를 통해서는 자국 전통과 국민성을 보여주며 멕시코 현대 회화의 아버지 혹은 민중 화가로 꼽힌다. 비록 사생활 측면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 다소 무질서하게 살았지만, 자국민의 더 나은 삶을 실현하는 이상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실이다.

500페소 뒷면에 나와 있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그의 작품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칼로에 대해 말하자면, 100년 전 멕시코 사회에 비해 매우 개방적인 여성 지식인으로서 현재 여러 여성주의 운동가들에게 하나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보다 화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준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 하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약 9개월 동안 온몸을 깁스한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사고로 인해 40여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니 그녀가 느꼈을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이 재앙과 같은 사고는 그녀의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새겨졌을 고통을 그녀는 작품들에 고스란히 담아냈고, 그녀의 작품 세계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두 번째는 그녀의 남편인 리베라가 끊임없이 외도를 했다는 것이다. 칼로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사고가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이고, 또 하나는 리베라다!”라고 말할 정도로 리베라는 그녀를 계속 배신했다. 이 두 가지 사고로 인해 칼로는 평생 동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모두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칼로는 거울을 통해 고통과 직면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기에, 그녀의 작품 중에는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강한 의지로 절망을 승화시킨 그녀의 작품들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나는 그녀처럼 얼굴을 그리지 못한다”고 극찬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그림들에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다고 평가되지만, 칼로 본인은 상상이 아닌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며 초현실주의라는 틀로 자신의 작품이 규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칼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성(性)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나온다. 특이한 성 취향을 넘어서 그녀의 작품들에는 성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두드러진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남긴 신체적 불편함을 제외하더라도, 리베라의 여성 편력으로 받았던 상처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꿈꿨을지 모를 자유로운 성적 요소들을 그림에 담았다.

독특한 세계를 가졌던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지만, 이 칼럼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기에 칼로의 사회적인 위치에 대해 한마디만 더 언급하고 마무리하겠다.

프리다 칼로는 그 당시 가톨릭 중심의 멕시코 사회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고, 그녀의 얼굴을 화폐에 담을 정도로 아끼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사랑을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다. 먼저 칼로도 남편 리베라처럼 메소아메리카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들에 집중했었다. 그녀의 장식품들, 옷차림, 액세서리들은 모두 스페인군에게 침략 당하기 전 멕시코에 존재했던 민족들의 문화와 연계된 물품들이었다.

화려한 멕시코 전통 의상과 원주민들의 장식품, 땋아 올린 헤어스타일 등으로 프리다 스타일을 각인시키며 멕시코의 정체성을 서구에 알리는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또한 리베라와 같은 정치 노선으로 거리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고, 여성의 권익을 위한 정치적 활동을 했던 그녀는 오늘날 화가이자 활동가, 페미니스트로도 조명을 받으며 멕시코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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