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화폐로 보는 세계사 속 숨은 이야기

*알파고 시나씨(Alpago Şinasi) 하베르코레(Haber Kore) 편집장이 세계 각국 화폐 속에 담긴 그림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뉴스인(NEWSIN)에 연재한다. 터키에서 태어난 알파고 기자는 지난 2004년 한국으로 유학 와 충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터키 지한(Cihan)통신사 한국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2016)가 있다. 지난 9월에는 대학로에서 '한국생활백서'로 스탠딩코미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편집자주

5만 킵 뒷면에 보이는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의 대통령 궁전(Presidential palace)

[뉴스인] 알파고 시나씨 기자 = 라오스는 소련 붕괴 이후 남아 있는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다. 국제적으로 언론에서 공산주의 나라로 중국, 베트남, 북한 정도만 노출되다보니 별로 언급되지 않지만, 라오스의 공산화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다.

라오스 화폐 5만 킵(Kip) 뒷면에 보이는 건물은 라오스의 대통령 궁전이다. 이 건물에는 색다른 배경이 있다. 이 건물 공사는 1973년 시작됐다. 특이한 것은 건립 목적이다. 처음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궁전이 아니라 왕이 사용할 궁전으로 지었다. 즉 오늘날 라오스는 라오스 왕국의 후신이라는 말이다. 라오스 왕국은 1975년 공산 혁명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라오스 왕국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진행된 것일까.

현대적인 의미에서 라오스 왕국은 1949년 수립됐다. 프랑스 속국이었던 라오스 왕국은 1953년 완전히 독립했다. 그러나 라오스의 또 다른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 바로 공산주의다. 2차 대전 이전부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는 서양 식민지 총독부들의 약탈로 인해 공산주의 이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가 라오스 독립을 승인한 배경에는 이 지역을 공산화 위협에서 통치하는 것보다는 친서양 정책을 펼칠 왕을 두자는 의도가 있었다. 이 독립 과정에서 프랑스와 왕국 정부를 괴롭히고 독립에 큰 기여를 하면서 ‘붉은 왕자’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지도자가 있다. 바로 수파누봉(Souphanouvong)이다.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의 마지막 부왕이었던 보운콩(Bounkhong) 왕자의 세 아들 중 한 명이던 수파누봉은 자신의 이복동생과 달리 엄마가 평민이었다. 1950년 이후 라오스 왕국 정부는 국내 좌익 정당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탄압을 받았던 정치인 중 한 명이 수파누봉이었다.

프랑스와 베트남에서 유학했던 수파누봉 왕자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좌파단체인 파테트라오(Pathet Lao)의 지도자가 됐다. 국회의 정치적인 틀 안에서만 투쟁했던 수파누봉은 1959년 체포되는 일련의 사건을 경험했고, 파테트라오는 폭력적인 투쟁을 택하게 됐다. 1975년까지 계속된 내전이 끝나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라오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왕국은 폐지됐고 수파누봉은 새로 탄생한 국가의 첫 대통령이 됐다.

10만 킵 뒷면에 보이는 라오스 초대 총리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

라오스 화폐를 보면 알겠지만 모든 라오스 화폐에는 오직 한 명의 초상화가 있다. 의아하게도 그는 수파누봉이 아니다. 라오스 초대 총리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이다. 독자들이 당황하기 전에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내전 시절을 돌아보겠다.

라오스 내전 시절에는 파테트라오와 함께 공산주의를 내세운 강한 세력이 하나 더 있었다. 라오인민혁명당이다. 뿌리를 찾아보자면 라오인민혁명당은 호찌민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라오스 부서였다가 파테트라오와 연대했다. 처음에 조직으로 움직였던 라오인민혁명당은 1975년까지 파테트라오를 통해 활동해 왔다. 현재 라오스 집권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의 초대 정당 서기장을 누가 맡았냐고 물어본다면, 답변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카이손 폼비한이다.

폼비한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는 수파누봉 대통령 시절에도 실세였고, 수파누봉 대통령 다음 대통령 때도 실세였다. 라오스 실권자였던 폼비한은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다. 라오스 사람들은 폼비한을 라오스-베트남 혼혈로 보고 있지만, 그가 완전히 베트남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카이손 폼비한이 어느 민족이었는지를 떠나 그는 완전히 친베트남 정책을 펼쳤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0만 킵 앞면에 보이는 카이손 폼비한 기념관

오늘날 라오스에서 폼비한의 의미나 위상을 알려면 10만 킵이 도움이 된다. 1989년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허용한 라오스는 특히 불교 문명 애호가들에게는 매력적인 나라다. 그러나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불교 사원만큼 인기 있는 또 다른 관광지가 있는데, 바로 카이손 폼비한 기념관이다.

베트남 지원으로 지어진 이 큰 기념관만큼 라오스에서 또 다른 인물 중심적인 기념관은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라오스 국부는 카이손 폼비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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