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화폐로 보는 세계사 속 숨은 이야기

*알파고 시나씨(Alpago Şinasi) 하베르코레(Haber Kore) 편집장이 세계 각국 화폐 속에 담긴 그림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뉴스인(NEWSIN)에 연재한다. 터키에서 태어난 알파고 기자는 지난 2004년 한국으로 유학 와 충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터키 지한(Cihan)통신사 한국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2016)가 있다. 지난 9월에는 대학로에서 '한국생활백서'로 스탠딩코미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편집자주

2001년 발행된 20구르드 앞면에는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의 초상화가 있다. 아이티의 첫 독립을 일군 인물이다.

[뉴스인] 알파고 시나씨 기자 = 아이티(Haiti)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들은 지진, 홍수, 부정부패 아니면 쿠데타이다. 사실 아이티는 이런 단어들과 어울리지 않을 만한 역사로 탄생한 나라다. 미주에서 미국 다음으로 독립한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미국과 달리 식민지 세력의 후세대가 아니라 노예들의 직접 투쟁으로 건국됐다. 통화 단위로 구르드(goud)를 사용하는 아이티의 독립 과정을 화폐 속 초상화 인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이티 독립의 불을 태운 사람은 20구르드(HTG) 앞면에 사진이 있는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이다. 노예로 태어난 루베르튀르는 착한 프랑스 지주 아래서 자랐다. 그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눈치 챈 프랑스 지주는 루베르튀르에게 논이 아니라 별장에서 일을 시켰다.

그나마 편하게 일할 수 있었던 루베르튀르는 많은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 프랑스에서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식민지인 아이티에서는 자유를 얻은 흑인들끼리 투표권과 평등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1791년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와중 루베르튀르는 반군의 지도자가 되었고, 반란을 독립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독립 전쟁 중에는 루베르튀르가 지도하는 반란군이 때로는 프랑스군과, 때로는 영국군과 전쟁을 벌였다. 거의 10년 걸친 독립 투쟁 끝에 1801년 루베르튀르는 자신이 만든 헌법과 함께 아이티의 독립을 선포했다.

노예들이 힘을 모아 독립을 얻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특히 아이티는 그 당시 세계 설탕 공급의 35% 이상을 생산하는 중요한 식민지였다. 프랑스 등에서는 아이티의 독립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루베르튀르를 군사력으로 이기지 못한 프랑스는 아이티 독립군에 있는 파벌 갈등과 정치적인 꼼수를 이용해 1802년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렇다면 아이티는 어떻게 완전히 독립을 했을까?

250구르드 앞면의 장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 Emperor Jacques I of Haiti)은 아이티의 초대 대통령이다.

250구르드 앞면을 보면 장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의 초상화가 있다. 한때 루베르튀르의 오른팔로까지 승진한 드살린은 프랑스군이 루베르튀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별달리 항의하지 않았고 프랑스 통치를 인정했다.

노예 제도 폐지를 약속한 프랑스는 1803년 그 약속을 깨트렸고, 이에 아이티 사람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 때 장자크 드살린이 루베르튀르의 역할을 이어 받아 독립군 지도를 맡았다. 1804년 프랑스군은 완전히 패배한 채 아이티를 떠났고, 드살린은 아이티 독립국을 선포하며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드살린은 아직도 아이티에서 영웅으로 모시는 인물이지만, 그는 민주주의로 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을 보고 초대 황제가 되어 자크 1세라 칭했다. 1805년 제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아이티는 제국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아이티는 어떻게 공화국으로 넘어왔을까?

드살린의 제국 선포는 자신의 측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혁명군에서 영향력이 있는 알렉상드르 페시옹(Alexandre Pétion)과 앙리 크리스토프(Henry Christophe)가 드살린에게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1806년 드살린이 살해되었고, 제국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생한 문제는 분단이었다. 알렉상드르 페시옹과 앙리 크리스토프가 서로 갈등을 겪어 아이티 남부에서는 페시옹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수립됐고, 북부에서는 앙리가 왕으로 즉위하며 왕국이 설립되었다.

500구르드 앞면의 알렉상드르 페시옹은 아이티 남부의 대통령이었다.

500구르드 앞면에 사진이 실려 있는 페시옹은 가장 먼저 한 일이 토지 분배였다. 이 정책은 남부 아이티 생산력에 큰 타격을 줬지만 국민은 페시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페시옹은 그 당시 남미에서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도 물질적으로 지원을 해줬다. 1818년 황열병으로 사망한 페시옹 다음으로 남부에서는 장 피에르 부아예가 대통령이 되었다. 부아예 대통령은 1820년대 아이티를 다시 통일시켰다.

100구르드 앞면의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President of Northern Haiti, later King Henri I of Haiti)는 아이티 북부의 대통령과 왕을 지냈다.

아이티의 탄생 이야기만 하고 여행 팁을 빼먹는다면 뭔가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100구르드로 이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100구르드 앞면에 초상화가 있는 앙리 크리스토프는 아이티 북부에서 1806년 대통령이 된 뒤 1811년 왕이 되었다.

그리고 페시옹과 달리 앙리는 토지 분배를 하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잃었던 앙리의 정책 중 좋은 점도 하나 있었다. 국가 예산이 남부에 비해 많아서 성과 요새를 많이 만들 수 있었다. 현재 아이티에 있는 역사 유적지 대다수는 앙리 시절에 아이티 북부에 세운 건물들이다.

100구르드 뒷면에는 밀로트(Milot)에 있는 앙리 성채(Henry Citadel)가 나와 있다.

아이티 역사 유적지 중 대표적인 건물은 100구르드 뒷면에 보이는 앙리 성채(Henry Citadel)이다. 1820년 만들어진 이 성채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 Au Prince)가 아니라 역사적인 수도로 알려진 밀로트(Milot)에 있다. 오늘날에도 아이티에 관광 목적으로 가는 외국인들은 수도보다는 앙리 시대에 급속도로 부흥했던 밀로트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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