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칸쿤에서 유카탄 반도 전문 현지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는 유재선(Alex Yoo) 씨가 마야문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뉴스인(NEWSIN)에 보내왔습니다. 유재선 씨는 유카탄 반도에서 10~13세기 번성했던 마야 신제국 도시인 치첸이트사(Chichén Itza)의 한국인 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멕시코 유카탄 반도 치첸이트사의 우물. 마야 문명 유적이 나왔던 곳이다. (사진=유재선)

[뉴스인] 유재선 = 마야인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이 살던 도시를 버리고 새 땅으로 옮겨 다시 도시를 세우곤 했다. 스페인에 점령되기 전에 그들이 버린 도시는 그대로 밀림에 묻혀버렸고, 스페인군에 정복된 도시는 이교도의 도시라는 이유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특히 가톨릭 신부들은 마야인들의 문서를 남김없이 찾아 불태웠다.

오늘날 전해지는 문서는 단지 사본 세 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스티븐스가 유적지를 발견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마야의 역사는 수수께끼투성이였다.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처럼 수 천 년 된 문명은 자료가 많이 전해지는데 비해, 겨우 300년 전에 멸망한 마야나 아스테카는 하루아침에 목이 잘리고 불태워져 그대로 잊히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마야 후손들은 모두 100만 명쯤 되는데, 그 중 자기네 옛 글자를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데 란다 주교가 남긴 책은 마야의 돌비석과 건축물마다 새겨져 있는 기묘한 그림문자의 체계를 풀 열쇠가 되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글자를 썼던 유일한 민족인 마야. 마야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역사를 철저히 파괴한 데 란다의 책 덕분에 조금씩 벗겨졌다. 그렇지만 워낙 남은 자료가 없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많은 고고학자와 몇몇 천재 언어학자들의 피와 땀이 일구어낸 열매이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유카탄 반도의 밀림지역 여러 곳에서 마야 유적이 활발하게 발굴되어서 마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는 서너 달에 한 번꼴로 마야 유적 발굴 기사가 실렸을 만큼 세계 고고학계의 눈과 귀는 온통 마야에 쏠려 있었다.

치첸이트사에서 유물 발굴에 나선 에드워드 허버트톰슨 일행 (사진=유재선 제공)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슐리만에 빗대어 '마야의 슐리만'이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허버트톰슨. 1885년 25살에 미국 영사로 과테말라에 간 그는 슐리만처럼 책 한권에 쓰인 전설을 철석같이 믿고 유굴 발굴에 나선 사람이다.

톰슨은 마야의 도시 중에서 크기와 화려함으로 최고였던 치첸이트사를 찾아갔다. 데 란다 주교의 책에 쓰인 '성스러운 우물(Cenote)'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가뭄이 들거나 재앙이 생기면, 제관(祭官)은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아 성스러운 우물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물에 사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달래고 나면 제관이 처녀들을 우물가로 끌고 갔다.

“온갖 장신구로 아름답게 꾸민 미야 처녀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알고 엄숙한 마음으로 성지로 다가갔지만, 그들이 우물에 던져질 때마다 구슬프고 처절한 비명이 길게 메아리쳤다. 제관은 마야인들이 쓰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넉넉하게 우물에 던졌다. 만약 마야에 황금이 많았다면, 그 대부분은 이 우물 속에 있으리라.”

톰슨은 데 란다 주교가 쓴 이 구문을 믿었다. 7살 먹은 슐리만이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를 읽고 그리스 영웅들의 전설을 가슴에 품었다가 트로이를 발굴했듯이, 톰슨도 성스러운 우물을 발굴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톰슨은 피라미드 위에서 성스러운 우물로 가는 길을 발견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학회에서 우물 밑바닥을 탐색하겠다며 자금을 요청하자 참석자들은 모두 "죽고 싶다면 그런 끔찍한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있는데"라며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돈은 모아졌다. 톰슨은 보스턴으로 가서 잠수훈련을 받고, 흙을 퍼낼 굴삭기를 마련해서 치첸이트사로 돌아갔다. 우물의 지름은 가장 넓은 곳이 70m, 깊이는 25m나 되었다. 말이 우물이지 사실은 가파른 석회암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연못이었다.

톰슨은 먼저 사람만한 통나무를 줄에 메어 던져보았다. 처녀들이 못가에서 얼마나 멀리 던져질 수 있는지 알고 나자 곧 준설기를 아래로 드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설기의 강철통은 끈적끈적한 뻘흙을 수레 한 대 채울 만큼 판자위에 쏟아놓았다. 물론 거기에는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준설기는 날마다 쓰레기와 진흙을 퍼 올렸다. 태양은 숨 막힐 듯이 뜨거웠고, 썩는 냄새가 진저리가 쳐질 만큼 고약했다. 날이면 날마다 썩은 흙만 쌓여가자 톰슨은 초조해졌다. 이런 식으로 끝난다면 자기는 전설이 헛되었다는 것을 증명한 어리석은 사람이 될게 뻔했다.

하지만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톰슨은 퍼 올린 진흙더미를 뒤지다가 담황색 수지덩어리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냄새를 맡고, 맛도 보았다. 언뜻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그것을 불 위에 놓자, 정신을 잃을 만큼 강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마야인들이 인신공양을 할 때 쓰던 향이었다. 그날 톰슨은 몇 주일 만에 길고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전설이란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설기가 갖가지 장신구, 항아리, 돌칼, 작살촉, 비취, 접시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유물을 어느 정도 꺼낸 후, 톰슨이 나섰다. 준설기의 집게가 파고들 수 없는 틈새나 구석을 사람이 뒤질 차례였다. 그가 잠수복으로 갈아입자 인디오들이 다가와 슬픈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당연히 톰슨이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물속은 3m도 들어가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냄새나고 끈적끈적한 썩은 물에서 플래시는 쓸모가 없었다. 바로 옆 사람도 보이지 않는 그 걸쭉한 물속에서 톰슨과 그리스인 잠수부는 물 밑바닥을 장님처럼 더듬었다.

치첸이트사 우물에서 발굴된 유골과 금세공품 (사진=유재선 제공)

그렇게 발굴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우물 바닥에서 좁은 틈새를 손가락으로 후비고 있는 톰슨은 부드러우면서도 미끈거리는 어떤 것이 만져졌다. 톰슨은 소스라쳤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그 물체를 힘껏 떠밀었다.

그것은 통나무였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는데, 거기에는 실수해 빠진 도마뱀 따위를 빼고는 큰 뱀이나 원주민이 믿는 용은 물론 살아 있는 것이 없었다.

건져낸 것 중에는 사람 두개골이 많이 있었다. 모두 여자였다. 전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기록이었다.

어느 날 톰슨은 딱 하나 남자 두개골을 건졌다. 노인 뼈였다. 톰슨의 눈앞에 그 옛날 우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던지려는 제관을 끌어안고 연못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몇 달이 걸린 준설과 잠수가 끝났다. 톰슨이 얻은 유물은 갖가지 옥(玉)과 부싯돌, 돌창, 옷감, 금접시, 수지향 덩어리와 금이나 구리로 만든 방울 따위 자질구레한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에는 빠짐없이 상징적인 기호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톰슨은 1935년에 죽었는데, 유카탄에서 영사로 지내던 24년 동안 그는 사무실을 떠나 거의 밀림에서 살았다. 그는 인디오 오두막에서 인디오 음식을 먹고 인디오 말을 쓰고 살면서, 유적을 발굴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성스러운 우물에서 소망한 것을 이루었지만, 그것을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썩은 물에서 잠수하느라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청력을 잃은 데다, 멕시코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톰슨이 진흙탕에서 금을 건져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멕시코 정부가 국보를 훔쳤다고 그를 고소하고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기물을 압수하겠다고 통고했다. 억울했지만 일단 닥쳐오는 위험은 피해야했다. 그는 체포의 손길을 피해 재빨리 유카탄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절반쯤 지어진 범선을 빌려 허겁지겁 바다로 탈출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그의 일행은 26명이었는데 그가 배에 실은 식량은 11명분밖에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항해 도구를 하나도 싣지 못한 채 바다로 나섰다.

13일 동안 카리브 해를 떠돌며 말할 수 없이 고생한 끝에 톰슨 일행은 쿠바에 도착했다. 그 뒤로 그는 멕시코 땅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톰슨의 후반부 인생은 이처럼 기구했지만, 마야 발굴사를 말할 때 그의 이름은 언제나 맨 앞에 놓인다.

톰슨이 건진 금붙이들은 희귀한 가치를 지녔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을 노리고 인디오를 약탈했으므로, 아무리 정교한 장신구나 아름다운 그릇이라고 해도 운반하기 쉽도록 녹여서 금괴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마야인의 생활을 알 만한 금세공품은 거의 없었는데, 톰슨이 진흙 펄에서 잘 보존된 금세공품들을 건져낸 것이다. 

톰슨이 인양한 금붙이는 대부분 순금이 아니라 합금이었다. 그것은 세공 기술자들이 상당한 야금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합금 재료들은 거의가 수입품이었다. 마야가 밀림 속에 도시를 세우고 고립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 대륙에 걸쳐 무역을 하며 번성했다는 결적적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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