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복싱 WBA 세계챔피언 최현미 선수

▲최현미 선수는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올 거라며 사진 잘 찍어달라고 얘기하는 쾌활한 20대 숙녀다. (사진=민경찬 기자)

[뉴스인] 박소혜 기자 = 권투가 인기 국민스포츠이던 시절이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소위 '헝그리' 복서들. 홍수환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로 더 유명했다. 지금은 격투기 등 각종 종목에 밀려 권투는 비인기 스포츠가 됐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도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갖고 있는 현역 복서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인 26살 최현미 선수.

최현미는 지난 2008년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페더급 세계챔피언에 올라 7차 방어전에 성공했다. 이어 2013년에는 슈퍼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챔피언을 차지했고 지난해 2차 방어전에 성공했다.

이어 지난 1월23일 3차 방어전이 과학기술대 특설 링에서 예정돼 있었지만 이 경기는 1주일 전 취소됐다. 후원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최현미는 "12월부터 내내 체중 맞추고 준비했는데 힘이 빠진다"며 "경기가 취소되고 1주일간 쉬었다"고 했다.

1년에 시합을 3번 정도는 치러야 하는데 그중 1~2번은 이렇게 취소되기 일쑤란다. 링에 자주 올라가야 감을 잊지 않는데 아쉽기 그지없다고 전했다.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지 않게 레게머리로 땋아 올려 묶고 다부지게 상대의 허점을 쳐내는 링 위의 여왕 최현미는 11살 때부터 권투를 했다. 최현미의 고향은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평양이다.

◇ 북한 군인과 중국 군인 함께 최 씨 가족 탈북 도와

북한에서 유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합숙생활을 했던 최현미는 14살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다. 평양에서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데다 북한의 실상도 알 겨를이 없었다.

"13살이던 2003년 겨울 네 식구가 함경북도 청진을 거쳐 회령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여행을 갔어요. 그런데 기차가 정전되어 움직이지 않는가 하면 '꽃제비'(북한의 가난한 어린이)로 불리는 제 또래 아이들이 구걸하는 것을 처음 본 거예요. 제대로 된 북한 실상은 한국에 와서 알게 된 거죠."

이때 최 씨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게 된다. 중국 군인과 북한 군인이 함께 최 씨 가족의 탈북을 도왔다고 했다.

"군복 입고 총 가진 군인들이 길을 안내했어요. 저는 중국으로 여행 가는 줄만 알았죠. 폭 좁은 개울을 뛰어넘었는데 그게 두만강이었던 거예요. 북한에서 가져온 건 모두 버리고 새 옷으로 사 입으며 이동했는데 그때 청바지도 처음 입어봤어요."

어린 현미양이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안 것은 베트남에 도착해서였다.

"중국을 통해 베트남 국경까지 오니 더운 날씨더라고요. 밤사이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베트남에 도착했어요. 그때도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오토바이 4대가 우리 가족 4명을 태우기로 했다는데 어두운 밤에 보니 불빛이 8개여서 자동차가 잡으러 온 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죠. 오토바이가 8대인 것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최 씨 아버지는 가족들을 베트남의 호텔에 머무르게 하고는 먼저 한국으로 왔다.

국정원 조사를 받느라 최 씨 아버지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곧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믿은 가족들은 꼼짝없이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들키지 않으려 빛을 틀어막은 호텔 방에서 삼시세끼 주어지는 식사를 받아먹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했다.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는 최현미 선수의 양손에는 화려한 네일 컬러가 칠해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핑크라고 했다. (사진=민경찬 기자)

◇ 학교서 배운 남조선, 드라마 속 한국과 달라 '다른 나라인 줄'

최 씨 아버지는 외화벌이를 위한 군부대인 국제연합무역회사 평양본부 지도원이었다. 현미 씨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본이나 중국 다녀올 때 한국드라마나 미국영화 등이 담긴 CD를 가져오셨어요. 가족들이 다 돌려봤죠. 검열이요? 그럴 때는 아버지한테 다 전화가 와요. 검열하러 온 분들한테 음식 대접하고 돈 주고, CD는 없애버리면 그만이었죠. 평소에도 저희 집은 온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어 잔칫집 같았어요."

남부러울 것 없던 아버지는 왜 가족들을 데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일까. 현미 씨의 기억은 이랬다.

"큰아버지가 어느 날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가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사업을 크게 했는데 돈의 출처를 추궁당한 거죠. 고문을 당해 거의 폐인이 되어 나오셨어요. 아마 그때 저희 아버지도 탈북을 결심한 것 같아요."

어린 시절 탈북한 현미 씨에게 한국은 생각했던 이미지였을까.

"남조선은 쌀을 보내줘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고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몰래 집에서 CD로 보던 드라마에서는 잘 사는 나라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대만이나 일본, 중국처럼 한국이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는 줄 알았어요. 그게 남조선인지는 몰랐던 거예요."

운동선수에 대한 대우는 남과 북이 크게 달라 상처가 있었다고도 했다.

"북한에는 스포츠나 음악이 신분상승의 통로가 되기도 해요.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좋거든요. 평양 통일거리에 운동인 아파트가 따로 있고 월급도 많아요.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8~10년간 키우는 거죠. 한국에서는 잘해도 그만한 대우는 덜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운동을 이어가면서도 남북의 차이를 체감해야 했다.

"한국에서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이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보면 한 달만 평양에서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한국에 오니 선배들이 깨워도 안 일어나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내가 해야만 산다는 걸 알아요. 경쟁에서 떨어지면 쫓겨나거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기 때문에 합숙하면 새벽 운동도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조용히 나가는 거죠."

통일이 되면 운동에 있어서는 인재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라며 "북한 친구들이 한국에서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제가 지금 챔피언이 안 됐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선수층이 넓지 않은 한국에서 최현미는 여성복서 1세대 얘기를 들어 왔다. "경기 준비는 힘들지만 링에 올라가면 즐겁다. 떨리거나 불안하지도 않다"는 최현미는 앞으로 미국 무대에서 세계타이틀매치에 오르는 것이 꿈이다. 또 1세대 지도자가 되어 여자복싱감독과 국제심판에도 도전하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대학원에서 스포츠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최현미 선수는 한국수출입은행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지난 1월29일 라오스로 출발해 대학생 봉사단 20여 명과 함께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오는 3월 27일 3차 방어전이 예정돼 있다는 최현미. "후원 걱정 없이 운동에만 매달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매일 아침 중랑천 10km를 달리며 다시 의지를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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