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소장이자 바리톤 성악가로 왕성한 활동 중인 정경 박사(Ph.D). 그가 무릇 예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나아가 고전 예술인이 현대 사회를 수놓은 자본주의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지를 뉴스인(옛 뉴시스헬스) [예술상인] 칼럼을 통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10월 15일 미국 뉴욕을 방문한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이 카네기홀 극장 문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다. 무대를 마치고 열렬한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퇴장하던 나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 학과 출신의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뜸 노래를 그런 식으로 부르면 안 된다면서 내게 역정을 냈다. 초면인 사람에게 다짜고짜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당혹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배울 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가 제기한 비판의 요지는 나의 노래와 곡에 대한 해석이 일반적으로 학교나 성악에서 가르치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로 인해 듣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결국 그가 내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고 너 혼자만 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는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역사 속 그 어떤 뛰어난 예술가도 대중, 비평가, 자기 자신 모두에게 사랑받지는 못했다. 즉 완벽에 대한 허상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어떤 곡에 대한 나만의 해석, 나만의 표현 방식이 타 전문가나 비평가, 혹은 대중의 귀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항상 ‘더 나은’, 혹은 ‘더욱 완벽한’ 길을 향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술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상상력을 지니는 이유는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절대적인 잣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고 기계적이라며 비판을 받고, 일견 허술해 보이는 작품 속에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며 호평을 받기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동종업계의 지인에게 갑작스럽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축하를 받은 나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자신이 참석한 어느 자리에서 예술계 관계자들이 한참 동안 나와 나의 활동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비난을 늘어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와 더불어 예술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세상의 반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은 나머지 절반의 팬층을 확보했다는 의미라면서,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꺾이지 않고 곧장 나아갈 수 있기를 빈다고 말했다.
 
예술인이 타인에게 미움과 사랑을 함께 받으면 양극의 마찰로 인해 불꽃이 발생하고, 이는 새로운 창작열이나 작품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다. 어딘가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그와 같은 사건 자체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되짚다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가고 있구나!’

예술인을 넘어 예술상인으로서의 삶이란 ‘완벽’이라는 통설적인 개념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불완전함과 혼돈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에 가깝다.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삶을 밀어붙이자 그제야 한계선이라 여긴 벽이 뒤로 밀리며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껏 ‘완벽’이라는 허상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낭비했을까.

최근 널리 알려진 책의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미움받을 용기’라는 표현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내겐 이 표현이 ‘완벽하지 않을 용기’처럼 보였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나는 결심했다. 빈틈없고 기계적인 예술인이 아닌, 품이 넓고 따뜻한 예술상인으로 거듭나겠노라고.

※본문의 저작권은 영혼의날개 미디어와 뉴스인에 있습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뉴스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