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리랑랩소디'는 서울 혜화동 대학로 소극장 '동국'에서 11월8일까지 공연한다.

연극 ‘아리랑랩소디’는 세르비아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Ljubomir Simović)의 희곡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적 통치로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으로 배경을 바꿔 각색한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이 왕(삼촌)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원했던 ‘연극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혹은 못하는 척 하는) 미친 짓’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 메타포로 동원됐다.

원작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의 한 마을에 4명으로 구성된 유랑극단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리랑랩소디’에서는 그 무대가 식민지 조선으로 바뀔 뿐 거의 비슷하다.

전쟁, 죽음, 생존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침략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마을 주민들의 눈앞에서 꽃놀이, 물놀이를 즐기는 배우들은 천덕꾸러기, 심지어 눈엣가시와도 같다.

실종됐던 미친 배우는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무대에 갑자기 나타나 “나무칼로는 용의 배를 가를 수 없고, 독재자를 찌를 수 없단 말인가”라는 대사를 읊는다. 지켜보던 일경이 그를 독립군으로 간주하고 총으로 쏴 죽인다.

점령자들의 마수에 부모를 잃어 유랑극단을 따라나섰던 미친 배우는 삼촌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재혼한 광경을 목도한 햄릿의 극중 대사도 여럿 선보인다. 미친 배우의 광기어린 대사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진실과 행동을 일깨우는 소구로 절묘하게 활용된다.

미친 배우가 죽자 남은 극단 단원들은 마을을 떠난다. 모든 게 암울한 결말을 암시하는 것 같은 패배감이 무대를 감쌌다. 하지만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술주정뱅이 아비는 술을 끊고, 백정의 아들로 일본경찰에 부역했던 망나니 총각도 죽기 전에 참회한다.

독립군으로 오인 받아 죽음의 옥고를 치를 뻔했던 아들은 미친 배우의 죽음으로 천신만고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극단의 소동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부박하고 고통스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엄청난 문화적 각성을 접한다.

여러 영화와 연극 작품에서 배우로 활약했던 연출가 김경익은 '바보'를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소구로 삼고 있다.

김경익 감독은 연극이 끝나고 막걸리를 한잔 하는 자리에서 “떠난 단원들은 이런 마을의 변화를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미친 자, 바보는 스스로 모르게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그의 '바보론'을 펼치려는 속셈이었다.

그에게 미치거나 미친 척 하는 자, 점령당한 마을에서 연극무대를 꾸미려는 자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바보'들이다. 상식적으로 이들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 성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서 그들은 볼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는 게 김경익 감독의 이른 바 '바보론'이다.

김경익 감독은 작품 속 바보 광대를 역사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본다. 부처도 예수도, 에디슨도 남들이 보면 바보짓을 했기 때문에 인류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처녀지를 처음 개척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아리랑랩소디’ 주인공인 극중 미친 배우 오희준은 2007년 5월16일 에베레스트 원정등반대 부대장을 맡아 코리안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가 눈사태로 세상을 떠난 실존인물이다. 정확히는 김경익 감독이 아끼던 후배의 이름이 오희준이다.

그의 생각에는 죽은 후배 오희준도 바보다. 망자가 돼 돌아온 후배 오희준은 스스로 한 걸음 더 내딛어 '오를 수 없었던 산'을 '오를 수 있는 산'으로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라서 극단 이름도 ‘진일보’다.

고 노무현 대통령 얼굴이 등장한 포스터로 유명한 ‘바보 햄릿’에도 김경익 감독의 '바보론'이 녹아있다.

연출가 김경익 감독은 연희단 거리패의 대표 레파토리인 ‘햄릿’의 제1대 햄릿이다. 영화 ‘타짜’(2006)에서 정마담의 보디가드로 나온 냉혈한이 그다. 배우 설경구의 처녀작 영화인 ‘박하사탕’에서는 주연을 맡을 뻔했지만 고문 받는 대학생 역할로 출연했다. ‘남극일기’에서는 미친 송강호가 동상 걸린 그의 다리를 잘랐던 남극탐험대원으로 출연했다. 그가 연출을 맡아 널리 알려진 연극작품 중에 ‘봄날은 간다’가 유독 귀에 익다.

‘아리랑 랩소디’에 등장하는 음악은 죄다 '아리랑'이다. 수십 가지 방식으로 편곡된 아리랑은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압축된 틈새를 완벽하게 메웠다. 간혹 관객들에게 뜻 모를 눈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경익 감독의 친구 서울대 최우정 교수(작곡과)가 테마곡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작품이 뮤지컬로 재탄생한다면 그때가 본게임"이라는 최 교수의 음악 헌정 후일담을 들려줬다.

김 감독은 통일이 되면 한반도 전역에서 이 작품으로 순회공연을 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민폐 끼치지 않게, 큰 차량에 숙식도구를 모두 싣고, 특별히 쾌적한 무대 대신 풍찬노숙 장소 그대로 무대를 삼는, 말 그대로 유랑극단을 하겠단다. 우선 남한을 다 돌고, 북한을 돈 뒤 시베리아 열차길 따라 상 페테르부르크까지 돌기로 했는데, KBS PD 동행약속까지 받아놨다고 자랑을 한다.

먹고 살기 녹록찮은 연극판에서 이렇게 순진한 바보가 또 있나 싶다. 늦깎이 장가에 곧 100일이 다가오는 딸 바보이기도 하다. 끼리끼리 논다고, 김 감독 자신이 바보니 바보들을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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