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소장이자 바리톤 성악가로 왕성한 활동 중인 정경 박사(Ph.D). 그가 무릇 예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나아가 고전 예술인이 현대 사회를 수놓은 자본주의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지를 뉴시스헬스 [예술상인] 칼럼을 통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

【서울=뉴시스헬스】정경 논설위원 =  하나의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공연을 준비하는 사전작업, 무대 위의 실연(實演), 무대를 마친 뒤의 마무리 단계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관객과 직접 조우하는 두 번째 단계, 즉 실연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 대중과의 소통과 교감은 예술인에게 있어 존재의 이유와 같기에 이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가 갈구하는 이상적인 예술인의 모습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있다. 그것은 본무대 전후에까지도 역량을 발휘하는 일종의 ‘종합 예술 기획인’의 형태에 가깝다. 결국 현 시대의 예술인에게는 공연 전후의 모든 과정까지도 일련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어느 공공기관에서 주관하는 공연에 출연을 제의받은 일이 있다. 그들의 제안을 검토해보니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소 조율이 필요했다. 소속사가 있는 나에게는 출연 시 받는 개런티가 책정되어 있다.

그러나 공연을 제안한 측은 공공기관이었고 예산 운용이 유동적일 수 없는 탓에 이를 모두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 또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회사의 원칙을 무시하고 계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내가 그저 '예술가'였다면 개런티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무대에 설 기회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저 '상인'이었다면 그들의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술상인'으로서 고심 끝에 내가 내놓은 답변은,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였다.

공연과 관련한 제반 사항들을 나와 직접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약속된 장소에 나타난 내 모습에 그들은 적잖이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그곳에는 연락을 주고받았던 공연 기획 담당자뿐 아니라 최고책임자, 타 공연 기획 관계자들까지도 모여 있었다.

반나절 가까운 시간 동안의 논의 끝에 우리 모두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최초에 제안 받은 공연을 포함해 총 네 개의 공연 출연을 추가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들은 희망하던 출연자를 얻었고, 타 공연 관계자들은 새로운 출연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는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예술가에게 있어 ‘사전 무대’가 본무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몇 차례의 공연이 이어지며 나는 또 다른 공연 관계자, 기획자, 팬들과 접점을 만들 것이다.

나아가 공연이 끝난 이후에는 모두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질타와 피드백을 양분 삼아 다음 무대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을 도하점(渡河點)을 찾아낼 것이다.

이렇게 전(前)-본(本)-후(後)의 세 단계 무대는 거미줄처럼 얽혀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연결 고리를 생성해낸다. 그리고 그로부터 더 나은 내일의 무대가 끊임없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와 부유층의 무조건적인 지원으로 예술가가 성장하는 시대는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비단 예술계뿐 아니라 산업 분야 전반이 겪은 변화이기도 하다. 의료계나 법조계 역시 진료나 전문적인 업무만을 수행하던 예전과는 달리 영업 및 경영적인 요소를 부가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예술계는 타 업계보다 그와 같은 시대 변화의 흐름에 현저히 뒤쳐져 있는 편이다. 순수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오늘날의 예술인이 갖춰야 할 요소는 이전에 비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순수성’을 방패삼아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예술가가 무대 위에서의 실연뿐만 아니라 전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 예술은 하나의 ‘융합 창조 산업’으로서 예술경영학적인 시각을 갖춘 이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하고 있다.
 
시대, 사회와의 진솔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중에게 보다 좋은 작품을, 더 좋은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예술인들 사이에서 늘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현실과 순수 사이의 안정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예술인은 보다 견고한 신념과 온전한 열의를 다해 예술에 담긴 ‘진정한 순수’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술상인'으로서 나는 늘 세 단계 무대를 동시에 준비한다. 새로운 무대에의 기회란, 항상 이 세 무대가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기교와 그에 대한 평가만을 강조하는 예술은 껍데기일 뿐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객에게 다가가고, 사회를 꿰뚫는 작품 창작에 고뇌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는 경영학적 관점을 갖춘 예술과 예술인이 무대 안팎에서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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