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헬스】고선윤 논설위원 = 나는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20년 하루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은 아들이 ‘대한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입대했다. 오늘도 무사히 건강하기만 바란다.
무엇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도 없고 상상도 되지 않는 논산훈련소의 긴 담장 너머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글을 수없이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일천추’란 이런 것일 거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만이 알 수 있는 깊고 무겁고 긴 시간이다.
마침내 ‘오늘은 일요일입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았다. 훈련소에서 보낸 첫 편지다. 글자 하나하나 아들의 소리를 느끼면서 읽고 싶은 마음에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딸아이는 호들갑 떤다고 눈치를 주지만 상관할 바 아니다.
“초코파이 2개, 콜라 1병을 준다는 말에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절에서 수계를 받고나오는 친구의 손에 초코파이 1개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우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는 친구들이 박스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패배감을 느끼고 슬퍼졌습니다. 나는 오늘 성당에 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웃음이 빵 터졌다.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듯 엄숙하게 방으로 들어간 나의 깔깔 웃음소리에 뭔 일이냐고 다들 뛰어 들어왔다. 이 이야기를 시어머니가 아시면 ‘어미가 믿음이 없어서 새끼가 저런다고’고 혼내실 게 분명하다.
사월초팔일이면 절에 등을 다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 땐 그 지역의 신사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한달에 한번 장학금 받는 날에는 궁사(宮司: 신사의 총책임자)의 말씀을 듣고 차를 마셨다. 친구가 좋아서 그를 따라 교회에도 갔었다. 함께 밥을 먹고 성가를 부르고 즐거웠다. 그리고 가톨릭 집안의 남자를 만나 성당에서 식을 올렸다. ‘미카엘라’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남자랑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나는 성당에서의 식을 고집했을 것이다. 다이애나비 결혼식을 기억하는 단발머리 여드름 소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과 길게 늘어뜨린 트레인, 파이프오르간의 웅장한 소리를 동경하면서 성당에서의 결혼을 상상했었다.
하기야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든 여러 종교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일본사람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를 찾아 건강을 기원하고 사람이 죽으면 절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이른바 ‘산자의 일은 신사에서, 죽은 자의 의식은 절에서’라고 말하는 그들이 결혼식만은 교회를 선호하는 것 역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여하튼 우리집 거실에는 시어머니가 걸어주신 십자가가 있고, 작은 성모상도 있다. 내 지갑 안에는 친정어머니가 입춘 때 절에서 받았다는 부적이 있다. 책장에는 파란색 바탕에 눈 하나 그려놓은 ‘나자르 본주우(악마의 눈)’를 올려놓았다. 질투의 시선을 반사한다는 터키의 부적이다. 일본의 작은 사찰에서 사온 ‘학업어수(學業御守)’라고 적힌 ‘오마모리’는 수험생 딸아이의 가방에 달았다. 우유부단한 나의 성격은 종교 앞에서도 다르지 않다. 종교를 가지고 누구랑 다투는 일도 없지만, 종교 속에서 내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백년 살면서 수많은 시간 기도할 곳을 찾아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갔었다. 어찌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커다란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들이 초코파이를 위해서 교회를 찾은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갖고 싶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손을 모았다. 더 많은 것을 더 좋을 것을 얻게 해줄 수 있는 영험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지금 나는 아들을 위한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다. 초코파이를 위한 그런 기도가 아니라 내 마음을 내려놓고 전지전능한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의지하고 싶다. 대한의 아들을 둔 엄마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