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소장이자 바리톤 성악가로 왕성한 활동 중인 정경 박사(Ph.D). 그가 무릇 예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나아가 고전 예술인이 현대 사회를 수놓은 자본주의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지를 뉴시스헬스 [예술상인] 칼럼을 통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

어느 콩쿠르 결선 날이었다. 결선까지 진출한 성악도는 나를 포함해 모두 넷. 당시 나의 목표는 입상이었다. 쉽게 말해 꼴찌만은 면하자는 각오였다.

행운이 따랐다고 표현하기엔 타인의 불운이었지만 내 바로 앞 순번의 참가자가 공연 중 가사를 잊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참가자는 이미 평정심을 잃은 듯했다. 그가 가사를 다시 생각해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상황은 연주를 중단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대학 입시나 실기 시험과 달리 콩쿠르는 예술가의 실연(實演, live performance)을 바탕으로 평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공연 중 가사를 잊거나 연주가 중단되는 상황은 곧 탈락과 같다. 앞선 무대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으려 마음을 억누른 덕에 나는 큰 실수 없이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내가 입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그리도 큰 실수를 범한 참가자가 당당히 1위에 입상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커다란 대자보에 마련된 4위 자리에 내 이름 두 자가 검은색 마커로 거대하게 적혀 있던 그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의 일을 이야기할 때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이라는 단어들로 상황을 판단한다. 당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결선 진출자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고, 심사위원 대다수가 그들의 지도 교수라는 풍문도 지인들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는 그와 같은 부조리함의 가능성을 핑계 삼아 자신의 부족함을 덮거나 자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꼴찌를 한 것은 오직 나 자신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요, 설령 그와 같은 연(緣)이 그림자 속에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할 만큼의 기량을 갖추지 못한 나의 책임이었다. 핑계와 가정, 그리고 상황에 대한 합리화는 적어도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예술인이 지녀야 할 덕목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난날의 아픈 경험을 소중한 발판으로 여긴다. 그날의 사건은 당시 군대에서 돌아와 실력에 자만하고 있던 나를 깨우는 경종이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은 오늘의 예비 예술인들이 흘리고 있는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길로 성장했으며 그들의 눈물은 훗날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손길로 성장할 것임을 믿는다.

수많은 무대, 방송 출연 등은 평범한 나를 실제보다 커 보이도록 조명한다. 조명을 벗어난 곳에서의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하면 노래를 조금 더 잘할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뛰어난 성악가들을 존경하는 동시에 질투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과 일정에 감동을 느끼는 평범한 예술인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가 정경은 연(緣)을 바탕으로 자라 왔다. 따라서 연(緣)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학연, 지연, 혈연을 옹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될 것임을 역설하는 바이다.

내가 긍정하고자 하는 연(緣)이란 바로 ‘인연(因緣)’을 말한다. 내 부족한 노래에 감동을 받았다며 또 다른 무대에 초청해주시는 인연. 어떤 방송에서 나를 처음 봤는데 자신들이 기획하는 프로그램에 적격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는 인연, 지쳐 힘들어 쓰러져 있을 때 항상 응원한다는 작은 말 한 마디로 나의 거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소중한 인연.

이 모든 인연 하나하나가 과거 넘어졌던 나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 세워 먼지를 털어주고, 다시 웃게 하고, 이곳까지 오게 해 준 '연(緣)'이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따자."
-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Don Quixot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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