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정신 나간 작곡가와 키스(KISS)하다'
지난 5일 오후 서울시 중구 페럼타워에서 열린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 '정신 나간 작곡가와 키스(KISS)하다'는 '땅콩 회항' 사태로 실형을 선고받은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甲乙)' 문제를 세기의 음악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통해 얘기해보는 자리였다.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은 모든 걸 다 가졌을 것 같지만, 사랑 앞에서는 '을'이었답니다."
(사)오페라마 예술경영 연구소의 정경 소장(바리톤 성악가)이 베토벤을 모태 솔로ㆍ아버지의 노예ㆍ앵벌이ㆍ우울증 등을 가진 '을'이었다고 설명하자 이날 교육에 참여한 기업의 인사ㆍ조직문화 담당자 등 200여 명은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베토벤은 1대1 음악 수업을 통해 만난 여학생들에게 구애하고 거절당했지만, 실패를 과감히 받아들였어요. 최근 S대학 교수가 학생에게 카톡을 보내며 '연락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소수정예로 판단하겠다'고 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정경 소장은 과도한 앵벌이 등 베토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정신적 폭행을 최근 논란이 된 어린이집 폭행 사건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비교했다. 옛날에도 존재했던 갑과 을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파생되고 있는지 고전에서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중간중간에는 '오페라(Opera)'와 '드라마(Drama)'를 합친 예술 장르인 '오페라마(Operama)' 뮤직비디오와 공연도 선뵀다. 정경 소장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에서 바람둥이 귀족 조반니를 열연했다.
관객석 바로 앞까지 내려와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치고,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중세 기사들의 칼싸움까지 따라 한다. 노래는 분명 오페라인데 기존의 딱딱한 오페라 분위기가 아니다. 고전이 담고 있는 철학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고안해낸 창조 예술이다.
고전의 조반니는 현대에서 부하 직원의 성과를 가로채는 상사가 되기도 하고, 하청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갑 업체로 확장된다. 하인 레포렐로는 상사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부하이자 감정노동자다.
참여자들이 직접 갑과 을이 되는 상황극도 펼쳐졌다.
콜센터 직원 역할을 맡았던 ㈜에반스톤의 조한필 대표는 "살다 보면 을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며 "민원이 들어오면 을의 경우 정해져 있는 내용만 얘기할 수 있어 소비자가 답답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콜센터에 항의하는 역할을 맡은 뮤지컬 프로듀서 노주현씨는 "공연 쪽에 종사하다 보면 생트집을 잡는 관객도 많다"며 "콜센터 직원에게 항의하는 역할이긴 했지만, 이 역할도 나름의 입장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필리핀 혼혈아 '코피노(Kopino)'를 오페라마로 다루고, 수익금 일부를 필리핀 대사관에 전달한 정경 소장은 앞으로도 기업가ㆍ예술가 등 각계각층을 소재로 한 '정신 나간' 시리즈로 사회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정 소장은 "'정신 나갔다'는 말은 나쁜 의미로 많이 해석되지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며 "소위 '정신이 나갔다'고도 볼 수 있는 당대의 천재들이 말하고자 한 사회문제가 무엇이고, 현재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얘기해보고 싶다"고 프로그램을 만든 취지를 밝혔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로 이 자리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이런 교육에 관심을 갖고 필요를 느끼는 불특정 다수를 모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새로운 예술 장르로 해결해 보려는 의미 있는 시작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