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물 경기 중 낙마하는 선수, 다행히 이 선수는 즉시 다시 말에 올라 완주했다.
마필 육성목장에 가면, 어린 망아지와 어미 말이 함께 거니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말이 그저 탈 것이 아니라 어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것을 교육하기에 아주 좋은 멋진 장소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망아지는 매우 위험하다. 키가 1미터 가량 되는 망아지도 빠르게 뛰며, 발차기 힘도 대단하다. 망아지는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이나 순종하는 법 등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고삐 풀린 망아지’, ‘벌(판) 망아지 뛰듯 한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다. 함부로 다가가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한 번 실수했다고 그 망아지를 버리거나 죽일 것인가?

내가 평생을 두고 가장 싫어하는 말이 '눈 밖에 난다'는 말이다. 누가 감히 스스로를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눈 밖에 둔다는 것인가? 어느 학교에서 그런 놀라운 기준을 교육했고, 어느 기관에서 그런 판단 자격을 준 것인가? 스스로를 절대선의 천칭저울을 가진 신으로 착각하는 것인가?      
     
이런 현상은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입에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자신의 낡은 관습과 기준으로 패기 발랄한 젊은이들을 판단하고, 게다가 눈.밖.에. 둘.수.있.단.말.인.가? 이들은 전혀 새로운 가치와 판단을 지닌 신인류들이다. 변화와 학습이 필요한 것은 미래와 함께해야 할 나 같은 구세대들이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은 ‘신제품’이다. 그들은 그들이 최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정직하라. 노력하라. 성실하라. 미래는 밝고, 너희는 소중하다’라고 배워 왔다. 방금 생산된 통조림처럼 그들 대부분은 싱싱한 내용물과 희망적인 미래를 품은 채 세상에 내버려진다. 그리고 부패된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오염된다. 그 오염된 세상은 어디인가? 그 부패된 사람들, 기존 세대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 장애물 연습중인 고교생. 연습만이 좋은 성적을 낸다.

지금 70대 중반이신 나의 노스승이 한분 계신다. 고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 그분은 그동안 배출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정직해서, 성실해서, 희망적이어서 세상으로부터 겪을 수많은 고초를 생각하면, 이제 다시 교편에 섰을 때 과연 제자들에게 ‘정직하라. 노력하라. 성실하라. 미래는 밝고, 너희는 소중하다’라고 다시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답을 내셨다고 한다.

결국 그분은 스승이시다. ‘정직하라. 노력하라. 성실하라. 미래는 밝고, 너희는 소중하다’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그래야 세상은 어느 정도 평형을 유지하고, 사람들은 ‘맑고 밝다는 것’의 기준을 알 것 아니겠느냐? 학교에서부터 배금주의와 요령을 가르친다면, 우리 세상은 영 글러먹을 것이라고.  

나 역시 50넘은 중년. 내 아집에 사로잡혀 타인을 ‘눈밖에 두는 짓’을 한다면, 단 한명의 젊은이들도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젊은이들의 단점이 보인다면, 그로 인해 삶에서 고초를 겪을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함께 고민해 줄 일이다.      
     
실수하니까 젊음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나름대로 죽을 만큼 고민하고 애써 노력하는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부족한 인간인 주제에, 감히 남을 예단하고 폄하하고, 사람의 공(功)과 과(過)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눈을 감고 미로를 헤매는 것과 뭐가 다를까? 스스로 설치한 덫에 걸려 고독한 노년을 맞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반성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저작권자 © 뉴스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