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승마장에서는 ‘벤츠 3인조’라는 괴담이 떠돌았다. 고급 벤츠를 탄 3명이 거들먹거리면서 미인가 승마장만 찾아다니며 “승마 회원이 되려고 하는데 잠깐 승마 체험을 해도 되겠느냐?”고 한 뒤 말에 올라 곧장 낙마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119를 불러라, 고발하겠다’라며 미인가 승마장 원장을 협박한 뒤 금전을 갈취한다는 소문이었다. 만약 스스로 말에 올랐으므로 사고가 났을 때도 스스로가 책임지는 시스템이라면 이런 사기와 자해공갈이 가능했을까?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성인이라면 승마하기 전에 반드시 승마장을 돌아본다. 시설이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승마장 주의 면책 각서를 쓴다. 자신이 승마를 위해 가입한 보험으로 유사시를 대비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100억원을 받고 싶으면 100억원짜리 보험에 가입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신이 선택해서 승마를 했더라도, 낙마하면 승마장 주인과 애꿎은 교관이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이같은 사례는 승마뿐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익스트림 스포츠에서도 개인이 각서를 쓰고 그 종목을 즐긴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각서가 별 효력이 없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로스쿨에 다니는 법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그런 각서는 별 효력이 없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이죠.” 다른 종목의 책임자들도 이렇게 휴지 조각 같은 각서를 받고 위험천만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승마장 사고 건과 그 책임문제로 노심초사 하는 것을 본 한 지인이 이런 의견을 주셨다.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감내하는 것이 어른이고, 누군가가 돌봐주고 누군가가 책임져 준다면 그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어린이죠. 한국에서는 아이들만 말 탑니까?” 나는 유구무언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러나 누군가가 돌봐주고 책임져 주는 ‘아동’ 민주주의 국가다. 내가 선택한 일이면, 스스로 한계 안에서 책임을 감내하는 성인들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드러누워서 울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서고 누군가가 책임을 대신 져주고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는 성인들의 민주국가가 되기엔 애당초 멀었다.

어른이라면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만들고, 어린이라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주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본일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책임지는 것으로 알고 승마나 기타 스포츠를 한다면, 재빨리 일어나 병원 가서 치료받고, 회복하고, 다시 사회에 돌아올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침대축구’처럼 드러누워 읍소하고, 눈치 보며 누군가의 책임과 희생을 강요하는 아동민주주의의 폐해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가 TV에서 보는 여러 장면이 이와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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