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기 뉴시스헬스힐링승마사업단장 allbarol@naver.com

발달장애로 한 손이 불편한 지홍이. 나는 말수가 적은 이 아이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 아이에게 새로운 목표를 주고 싶었다.

일상을 깨고 진정한 자아와 그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만 넘어선다면, 이 아이는 재활승마 외에 더 많은 멋진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처음 승마 수업을 배운 뒤, "이번에 오신 승마선생님은 너무 무섭다. 승마가 싫어진다", "여기저기가 아프고 승마가 무섭다"라며 스스로의 한계 속에 머물기를 바랐다.

틀을 깨고 나온다는 것. 높은 말 위에 앉아서 빠르게 달리는 것. 게다가 장애물도 넘는다고?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이었다. 그건 지홍이 개인뿐만 아니라, 아이의 주변 사람들도 같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아이가 승마 가기 싫어해서 데리고 왔어요." 첫 훈련 다음 주엔, 하기 싫다는 아이를 엄마가 직접 손을 끌고 왔다. 편안하지 않은 지홍이 어머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갈등했다.

머지않아 지홍이가 자신의 벽을 허물고 말과 함께 날아오른다면 모두가 행복한 일이 될 것이지만, 이러다 혹시 작은 사고라도 나면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나는 계속 해야 할까?

"승마가 재미있어요"라고 당장이라도 지홍이가 바뀐다면 분위기는 돌변하겠지만, 지홍이와 지켜보는 사람들의 인내는 어디까지 일까? 지홍이를 지도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2주일? 한 달?

이대로라면 지홍이는 곧 승마를 포기할 것이다. 나는 애를 무섭게 몰아붙여, 결국 포기하게 만든 몹쓸 승마교사가 되겠지. 확신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이 아이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홍이가 할 수 있다고 믿었고, 비슷한 또래의 일반인 아이가 장애물 점프하는 사진, 동영상을 보여주며 격려했다.

속보와 구보 기초를 계속해서 교육했다. 이윽고 네 번째 승마훈련을 하는 날 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신다. "재미있대요. 빨리 승마하러 가재요." 나는 흐뭇했다. '예상보다 빨리 왔구나.'

똑같은 그날그날이 아닌 아이의 한계까지 조금 강하게 훈련하고, 아이에게 뚜렷한 목표를 주는 것. 처음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이다.

"한 손이 불편한 지홍이가 어떻게 장애물을 해?" 하지만 훈련 두 달 째 접어들면서 기초 장애물을 뛰어 넘은 뒤, 지홍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두려움을 넘어 섰으니 이젠 노력과 장애물의 높이만 남았다. 그것은 일반 아동들도 똑같다. 박지홍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또래의 어린이인 것이다.

7번째 훈련하는 날, 지홍이의 온 가족이 함께 지홍이가 점프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막연하고 두려운 가능성이 아닌, 현실의 지홍이가 장애물 점프를 하고 있었다.

이젠 아주 노련하게 장애물을 넘은 지홍이, 안정적인 기좌와 유연한 허리, 한 손 구보의 반동을 보며, 나 역시 한 고비 넘겼음을 느낀다.

지홍이가 "이번에 오신 승마선생님은 너무 무섭다. 승마가 싫어진다"고 했을 때, 포기하고 멈추었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교육받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보이는 사례를 중심으로 교육하면 보다 용이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홍이의 변화는 지홍이와 함께 수업하는 모든 장애인 어린이와 부모님의 변화와 발전이다.

이제 지홍이는 또 다른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목표인 동시에 기준이다. 나와 지홍이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아슬아슬하지만, 때로 내 고집이 기특할 때도 있다.

※ 진정한 종교는 느리게 성장한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그 뿌리가 쉽게 뽑히지 않는다. 반면 종교를 대신한 지적인 위조품은 그 안에 뿌리가 없다. 갑자기 피어났다가 갑자기 시든다. - 존 헨리 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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