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에 말을 가지고 가면, 5~6세 유치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와! 말이다.”를 외치고 어디론가 뛰어가 풀을 뜯어 온다.
한번은 아이들이 학교 화단을 엉망으로 만들고, 화초를 뜯어 말을 먹이는 바람에 교장선생님 뵙기 민망한 적도 있었다. “무섭지 않니?”, “아니오, 귀여워요오오~” 25Kg짜리 어린이가 자신의 20배가 넘는, 500Kg짜리 말이 귀엽다고 한다.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어린이들은 풀을 뜯어 말을 먹인다. 우리가 ‘말보다 힘이 약해서 풀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돌보는 유전자가 우리의 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사람은 누구나 말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나는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온당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근래 승마를 말 학대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에는 약 2만 여두의 말이 있다.
전쟁용 군마 수요가 없어지고, 마차 마로써의 역할도 자동차에게 넘겨주고, 파발마(擺撥馬)제도가 없어지면서 정보통신의 역할도 사라졌다. 현재는 오직, 승마와 경마 등 사람을 태우는 레포츠만이 유일한 말의 직업으로 남은 것이다.
승마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말이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막대한 한 달 사료, 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말의 개체수를 늘이지 못하는 것이다. 승마가 대중화 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선진국 들은 말의 개체수가 나라마다 수백만두를 오르내린다.
당연히 그 산업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승마산업이, 미국섬유산업 전체, 허리우드 영화산업 전체와 맞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F.T.A. 시대 농촌의 신성장동력’으로 그 위치를 새롭게 하고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말을 타고 국방을 지켜 온 대표적인 기마민족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동물 학대자이고, 말들이 우리와 함께 흘린 피는 다 헛된 것인가? 물론 그런 의미에서 말 학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말의 커다란 눈망울이 슬퍼 보이고, 사람 태우기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말은, 날씨 좋은 날 숲이든 어디든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함께 일 경우이다. 자연에서 포식자들의 습격을 받기 쉬운 겁 많은 동물 말에게는 사람만큼 든든한 벗이 없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을 태운 말은 봄의 산길에 마음 놓고 산책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는 아주 작은 개나 까치, 너구리 등도 말보다 먹이 사슬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야생에서 말은 그야말로 식용 동물인 것이다. 그런 말은 사람을 만나면서 먹이사슬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소중한 자원으로써, 인간의 여행과 삶에 동참하는 벗으로써 그 지위를 새로 부여받게 되었다. 전쟁용 군마뿐만 아니라, 마차마, 맹도마(盲導馬), 애완마 등등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 그 위치를 새롭게 한 것이다.
이렇듯 말에게는 어엿한 직업이 있다. 승마교실의 말들도 직장 동료로써 마필 관리자들이 정성으로 돌보고 예의를 갖춘다. 물론 우리도 일하기 싫을 때가 있다.
말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터로 향한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그 일자리로 말미암아 진행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말을 관상용으로 키울 수 있는 호사가는 몇이나 될까? 말과 인간의 관계는 희생이 아니라 공생 관계다. 일방적이 아닌, 상호간의 협조와 도움,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말을 기르지 않을 것이고,
말이 이 땅에 번성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의 개체수가 수백만두를 오르내리는 선진국은, 지금도 승마를 권장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2만여 두의 마필 밖에 없다. 승마가 간신히 시작되는 이때, 말 학대 운운은 지나친 속단이고 기우다. 어쩌면, 필요 없게 되자 말을 방치하고 버리자는 배덕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말을 돌보고, 말은 사람을 등에 태운다. 간단하다. 서로 양보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