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더라고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니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어요. 도움을 주신 분들 모두 한 가족입니다."

지난 2010년 우리나라에 입국해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김정희(가명·47·여)씨는 가족과 뿔뿔이 흩어질 뻔 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매번 이어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제 새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 9일 만난 김씨는 그 동안 도움 준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며 눈가가 촉촉해 졌다. 사선을 넘나들 만큼 힘든 탈북이었지만, 가족과 자유를 찾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가정의 달'인 5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하지만 북에서의 삶은 한 순간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함경북도 언성군에 살던 김씨는 지난 2003년 5월께 '남편이 사라졌다'며 시골 농장으로 추방당했다. 약초관리 사업소에서 일하던 안정적인 삶이 하루아침에 담배농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그마저도 일거수일투족 보위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 탓인지 2000년께부터 시달리던 두통은 벌레가 뇌를 파먹는 듯 한 고통으로 옮아붙었다. 몰래 구한 중국산 아스피린을 입 속에 털어 넣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당시 11살의 큰 딸과 6살의 작은 아들을 데리고 친척과 지인들의 집을 전전했다. 떠돌이 삶이 시작된 것이다.

"몸이 아파 일 못하는 저 대신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허드렛일을 했어요. '우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딸의 말에 정말 서러웠지만 눈물조차 말라버렸죠. 의지할 곳 하나 없었으니까요."

이때 중국에 살던 형님으로부터 어렵게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지금은 고생하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편지와 함께 들어있는 돈도 큰 힘이 됐다.

생활이 조금씩 안정돼 가던 찰나 또 다시 불행이 찾아왔다. 여동생이 아이를 낳던 중 숨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온 것이다. 그는 아들만 데리고 여동생이 있는 평양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함경북도 청진시의 한 대학에 다니던 딸과는 어쩔 수 없이 생이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도착한 김씨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있던 남편과 어렵사리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그러나 이 사실이 보위부에 들통 나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 일로 딸은 학교에서 사실상 감금 생활을 하게 됐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2009년 여름. 장마로 물이 불어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생사를 다투며 강물을 건넜다. 다행히 딸은 브로커를 통해 함께 탈북 할 수 있었다.

"국경에 국경을 넘는 기나긴 대장정이 시작됐어요. 이때 저와 아이들의 몸이 급격히 나빠졌죠. 딸은 심장병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고 아들은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렸어요. 현지 목사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죠."

지난 2010년 2월 어렵게 밟은 한국 땅. 위염과 위궤양, B형 간염 등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병원비에, 행여나 '북한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아프다는 말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은 주고 받고 있지만,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와 따로 살림을 차린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에서 겪은 아버지와 오빠, 여동생의 잇단 죽음 탓인지 서러움이 북받쳤다. 목숨 걸고 한국에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살던 아파트에서 밖으로 뛰어내리는 상상까지 했다.

이때 서울 남대문경찰서가 김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국립중앙의료원의 정의식 박사를 소개해 준 것이다. 오랜 고통에 이마저 성치 않아 소화기능 장애로 밥을 먹지 못하는 김씨를 위해 고구마와 과일도 지원을 받았다.

김씨는 경찰과 병원의 도움으로 정밀 진단을 받았고 주기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기초생활수급비 100만원으로 딸의 대학교 등록금과 고등학생인 아들의 학비, 집값, 생활비까지 내고나면 빠듯해요. 한 달 2~3만원의 병원비도 부담이 됩니다. 남대문경찰서와 정의식 박사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치료할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김씨는 최근 꿈이 생겼다. 하루빨리 병을 털어내고 평범한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아이들에게 번듯한 옷을 사주고 싶어요. 아들을 태권도 학원에 보내주고도 싶고요. 또 모두 함께 외식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도 대접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얻은 새로운 가족들 모두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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