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제약 용각산

【서울=뉴시스헬스】김정일 기자 = 올해로 41년을 맞는 용각산은 기침, 가래, 인후의 염증에 의한 통증, 부기, 불쾌감, 목쉼 등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전통의 진해거담제이다.

길경가루, 세네가, 행인, 감초 등의 순수 생약성분이 기관(氣管)내부에서 점액의 분비를 높이고 섬모운동을 활발하게 해 가래를 제거시키며 기침을 진정시키고 염증을 완화시켜주는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미세한 분말 제형이다.

용각산은 소비자의 제품 충성도와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동안 심각한 공해, 흡연 등으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특히 가수, 교사, 자동차 운전자들에게는 필수품처럼 여겨져 오고 있다.

1967년 6월26일 첫 발매된 이후 지금까지 7100만 갑 넘게 판매된 블록버스터 의약품이자, 국민적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 의약품으로 진해거담제 전체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50%를 넘어서고 있다.

40여 년간 판매된 용각산 제품의 케이스(직경 5.5㎝, 25g기준)를 이어보면 그 길이가 총 3905km로 한반도 남북(1000㎞)을 두 번 왕복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나오며 내용물의 무게만도 1775톤에 이른다.

◇기술제휴 협상만 2년…보령제약의 오늘 일등공신
1957년 설립한 보령약국의 성공으로 1963년 보령제약을 설립한 김승호 회장은 기업특성에 맞는 제품선정에 고심했다. 시류를 타기 위해서는 한창 붐을 이루고 있던 비타민류나 항생제 쪽으로 맞춰야 하겠지만 선발 제약업체에 비해 기술의 축적과 경험이 부족했고, 장기적 차원에서 제품의 연구와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할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서 내린 결정이 생약제제였다.

그러나 생약에 대한 연구결과는 국내에 절대부족한 편이었고, 형편상 독자적인 개발을 시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김 회장은 할 수 없이 일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해방 후 교역은 재개했지만 실무상의 접촉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한 직원이 '용각산'이라는 귀중한 정보를 가져왔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어에 능통했고 약업계에 오래 종사해 온 당시에는 몇 안 되는 일본통이었다. 용각산은 이미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널리 소개된 생약으로 가래와 기침, 특히 해소천식에 특효가 있던 약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용각산의 인기는 대단해 주식회사 용각산이 이 제품 하나로 일본 유수의 제약회사로 발돋움한 생약제제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끌어 모았던 용각산은 그때 이미 120여년의 역사를 지닌 생약으로 진해거담제로는 최고의 약이었다. 당시 한창 산업이 부흥기에 있던 때라 공해문제가 서서히 대두되던 무렵이어서 기침과 가래환자가 늘어가던 때였기 때문에 용각산은 시기적절한 제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 때 국내에 도입됐다가 해방과 더불어 20여 년간 우리에게서 잊혀져가고 있었다.

김승호 회장은 일본과의 창구가 열려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란 소리만 들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국민 정서를 고려해 자체개발에 나섰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일본과의 기술제휴를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의 용각산(류카쿠산)은 이미 제약업계에 든든한 기반을 잡은 대형제약사를 염두에 두고 한국 진출을 고려중인 상황이어서 역사가 작은 보령제약의 입장에서는 교섭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년이 흐른 뒤인 66년 6월22일 일본 용각산 사장이 방문한 이후 까다로운 협상에 응하던 용각산의 중역들도 결국은 김 회장의 강한 집념 앞에 가까운 시일 안에 계약을 체결할 것을 약속했다.

반년이 지난 1967년 1월23일 김 회장은 주식회사 용각산의 초청으로 최초의 해외 출장길에 오르게 되면서 만 2년 가까운 각고 끝에 용각산과의 기술제휴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성수동에 짓고 있던 공장을 한시바삐 완공해야 했던 것이다. 그해 겨울은 유달리 추워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도 추위에 지쳐 일하기를 꺼려했지만 김승호 회장은 앞장서 공사 진행을 독려하며, 마침내 1967년 4월 30일 근대적 공장을 성수동에 세웠다.

공장이 완공되자 주식회사 용각산에서는 기술진을 파견해 용각산의 생산에 착수해 20여 일만에 마침내 국내 최초의 생약제제인 용각산이 탄생했고, 1967년 6월 26일에는 용각산 5만 갑이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용각산은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 ‘일본약으로 돈을 벌려 한다’는 등 갖가지 구설수에 휘말리며 전혀 팔리지 않았다. 조악한 포장도 문제였다.

김 회장은 첫 출하물량 5만 갑을 모두 수거해 새로운 용기와 포장으로 무장한 뒤, 영업사원들과 함께 소비자를 직접 찾아 거리를 누볐다. 이때부터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는 약효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광고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용각산에 투입된 광고비는 단일품목으로서는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출시 이듬해인 1968년에는 전체 매출 9442만 원의 32%인 3056만 원을 광고에 투자했으며 몇 년간 계속 30% 내외의 광고비를 집행했다.

무모하다는 주위의 우려 속에서도 김 회장이 직접 만들어낸 "이 소리가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명카피가 탄생했고 오늘날 보령제약을 있게 한 대표제품이 됐다. 1973년부터 TV전파를 타기 시작해 20여년 계속된 이 카피의 광고 하나로 용각산은 일약 국민적 사랑을 받는 의약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용각산의 신화를 잇는 ‘용각산쿨’
‘용각산 쿨’은 순수생약성분의 진해거담제인 ‘용각산’의 제형과 포장을 새롭게 하고 약효를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선보인 제품이다.

미세한 분말제형인 용각산은 소비자의 제품충성도와 소비자 만족도가 매우 높은 편이지만 주고객층의 연령이 다소 높아 젊은층에게 친숙함을 주지 못했던 부분을 보완해 이들의 니즈를 겨냥한 '용각산 쿨'을 새롭게 선보이게 됐다.

‘용각산 쿨’은 휴대가 간편한 1회용 스틱포장으로 돼 있고 과립형이라 타액에 의해 쉽게 용해되며 물 없이 복용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산뜻한 복숭아향과 민트향이 첨가돼 맛과 향이 뛰어나며, 슈퍼 멘톨과 아선약 성분을 함유해 복용 직후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과 함께 입냄새 제거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감기로 인한 기침, 목쉼, 염증에 의한 인후의 통증에 우수한 효과를 나타내는 ‘용각산 쿨’은 선생님ㆍ가수 등 목을 많이 쓰는 분들 외에도 연인을 만나기 전 입냄새를 제거하거나, 노래방에서 목소리를 멋있게 하려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꾸준히 얻고 있다.
(사진=보령제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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