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는 14일(현지시간) A섹션 1면과 14면에 “지금까지 알츠하이머는 65세 이상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65세 이하의 환자도 미국에는 50만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미국에는 약 520만명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있다.
젊은 환자가 늘어난 것은 과학적인 진단이 가능해진 덕분이기도 하다. 알츠하이머는 보통 첫 번째 징후를 보인후 10년은 지나야 발병을 진단 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보다 공격적인 진단프로그램에 힘입어 조기 발견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알츠하이머재단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는 이들은 40대는 물론 30대에서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저널은 마흔살의 나이에 알츠하이머가 발병해 힘겹게 살아가는 케머러 씨 가족의 사연을 장문의 기사로 전해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기사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2003년 당시 45세였던 브라이언 캐머러 씨는 맨해튼의 소규모 헤지펀드의 CFO로 일한다. 그는 어느날 직장의 화장실에서 아내에게 전화로 “직장 동료가 내게 뭘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이름을 잊어버렸어. 종이같은 것을 꾹 눌러서 고정시키는게 뭐지?”하고”하고 물었다.
아내가 “스태플러 말하는거에요?” 하자 그는 “그게 맞는 것 같아”하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캐머러 씨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력 감퇴가 많아졌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언어구사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젊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증가하면서 자녀 양육 등 생활에 필요한 재정문제가 큰 걸림돌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발병 사실을 주위에 말해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하며 그 때문에 직업을 잃고 의료보험을 잃지는 않을지 두려워하고 있다.
전국연구기관인 알츠하이머협회는 2030년에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770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일부 증세에 한해 약간 완화시키는 약물만 있을 뿐 진행을 늦추거나 멈추게 하는 약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제약회사들은 알츠하이머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한 ‘아밀로이드’를 감소하거나 제거하는 새로운 약물을 연구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아마도 한 세대가 지날 때면 신약이 출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해 51세가 된 캐머러 씨는 다른 많은 환자와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 가족력이 없다. 그는 뉴욕 롱아일랜드 북부에서 성장했고 학창시절 재능이 많은, 남들보다 뛰어난 학생이었다. 알바니 뉴욕주립대를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에 들어간 그는 83년 투자은행인 러프킨 젠리트사에서 미래의 아내 캐시를 만났다.
역시 롱아일랜드 출신인 캐시는 짙은 갈색의 잘생긴 캐머리 씨와 사랑에 빠졌고 청혼을 받았다. 91년 결혼, 아들과 두 딸을 낳으면서 캐시는 직장을 그만뒀고 캐머러 씨는 롱아일랜드 매사패콰 파크에서 맨해튼으로 출퇴근 했다.
캐시는 남편이 일벌레였지만 활기차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캐머러 씨와 15년간 동료로 일했던 실버크레스트 어세트 매니지먼트의 공동창업자인 마틴 제프 씨는 “캐머러는 화이트칼러이면서 블루컬러의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퇴근하면 캐머러 씨는 아이들에게 가짜 콧수염이 달린 플라스틱 안경같은 재미있는 선물을 주는가 하면 아내에게 데이트를 하자며 나가서 춤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 열세살이 된 딸 케이트는 “아빠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플로리다로 깜짝 휴가를 가기도 했구요. 여름에는 바비큐를 먹고 별빛 아래서 즉석파티를 하기도 했어요”하고 좋았던 기억을 더듬었다.
캐머러 씨에게 처음 이상이 생긴 것은 98년이었다.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하기도 하고 어지럼증도 생겼다. 어떤 때는 아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신경과 의사를 찾아서 MRI 촬영을 했다. 결과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의사는 확신을 할 수 없다며 바로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명현상이나 어지럼증은 알츠하이머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감퇴 등 다른 환자들과 비슷한 징후들을 찾아야 했다. 사실 오늘날 알츠하이머는 검시 과정을 통해서만 공식적인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캐머러 씨의 부인은 남편의 뇌사진을 처음 봤을 때 “이것이 우리의 미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이 일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월가로 돌아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캐머러 부부는 무언가 확실해 질 때까지는 그냥 살던대로 있기로 했다. 아이들은 물론, 친구와 친척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캐머러 씨의 병이 직장에 알려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캐머러 씨 부인은 “그때 걱정으로 잠을 못이루는 날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99년 여름 캐머러 씨 부인은 남편의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운동화(스니커)’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남편은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마흔살이었다.
DLJ 뮤투얼펀드의 수석 임원이었던 남편의 중요한 일은 당시 1만1300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의 임원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었다.
1년이 지나자 그는 단어를 더 많이 잊어 버리게 됐다. 증세는 실어증과도 같았지만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가 숫자 때문에 애를 먹지는 않았다. 캐머러 씨는 즐기던 시가도 끊고 술도 끊었다. 자신의 문제를 벌충하기 위해 그는 동료들이 없는 야간근무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아내가 적어준 중요한 메모들을 읽었다.
캐머러 씨와 93년부터 2001년까지 같은 직장에 있었던 데비 에이비던은 그가 일중독자처럼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전 상사인 제프 씨는 그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숫자에는 밝으니까 지장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2000년 말 스위스 대기업인 크레딧 스위스그룹이 캐머러 씨가 다니던 회사를 인수하면서 임원들을 구조조정했다. 결국 캐머러 씨는 이듬해 6월 직장을 잃었다. 계약해지의 조건으로 2년치 봉급과 1년치의 의료보험이 주어진 그는 여름 내내 골프를 치며 휴식을 취했다.
그때만 해도 캐머러 씨는 특정한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물건들의 이름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다정하게 ‘당신(Sweetie)’, ‘친구(Buddy)'라고 부르며 재치있게 실수를 감출 줄 알았다.
직장을 떠난다는건 생각할 수 없었다. 3명의 아이들이 12살도 안됐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와 대학에 갈 때까지는 등록금을 대야 했다. 그는 눈높이를 좀 낮추기로 했다. 한 유럽회사의 미국지사에서 꽤 좋은 자리를 놓고 인터뷰를 잘했지만 아내에게 “여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대신 다른 사람들과 긴밀하게 접촉할 필요가 없는 일자리를 찾았다. 취업 인터뷰를 대비해서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적은 카드를 준비해서 익혔다. 2002년 말 마침내 클리퍼 트레이딩 어소시에이츠라는 작은 헤지펀드 회사의 CFO로 취직할 수 있었다. 회계와 행정을 총괄하지만 매도매수 시점을 결정하는 중요한 업무는 하지 않아도 됐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그는 전문가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정신치료를 하기도 했고 항우울제를 복용하기도 했다. 큰아들 패트릭은 아빠가 가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고 기억했다. 어느날 아빠에게 새 직장을 우스꽝스럽게 불렀지만 그것이 농담인줄 알아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3년 어느날 밤, ‘양전자 방사선 단층촬영(PET)’이라는 새로운 검사를 진행한 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캐머러 부부는 각각 전화기를 하나씩 들고 의사와 통화했다. 의사는 “캐머러 부인, 아주 나쁜 소식이에요. 남편은 알츠하이머 입니다”라고 말했다.
캐머러 부인은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짐 못한 채 의사한테 “집사람한테 문제가 생겼어요”하고 말했다. 그들 부부는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잠궜다. 아내는 남편에게 치매에 걸렸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은 장애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직장에 다녀야 가능한 것이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아이들의 사립학교 등록금이었다. 캐머러씨는 직장에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다니기로 했다.
2004년 그의 직장은 자금 문제로 문을 닫게 됐다. 캐머러 부인은 단기 기억력에 큰 문제를 보이는 남편이 새 직장을 구하기에는 너무 병세가 악화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뉴욕주 햄스테드에 있는 지방법원의 사무보조원으로 취직했지만 봉급이 너무 적었고 의료보험만 간신히 해결될 뿐이었다.
생계를 위해 아내가 직장을 구한 것이 캐머러 씨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캐머러 씨 부부는 사회보장국에 연락해 장애인 급여를 신청했다 변호사를 통해 방대한 양의 서류를 준비하는 일은 무려 18개월간 계속됐다.
신청서가 들어간 후 5주가 지나고서야 승인이 떨어졌다. 한달에 몇백불에 불과한 소셜국의 지원과 캐머러 부인의 급여가 수입의 전부였다.
캐머러 가족은 플로리다 포트로더데일로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이들 부부는 아들 패트릭에게 아빠의 건강에 대해 간단히 얘기를 해줬지만 지금은 콜린과 케이트, 두 딸에게는 좀 더 큰 다음에 해주기로 했다.
2006년말 이들 부부는 남편의 이름으로 된 자산들을 아내의 명의로 바꿨다. 병이 더디게 진행될 경우 치료비 보조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캐머러 씨의 치료비는 보험을 받아도 부담해야 하는 코페이가 연간 5000~6000달러에 달했고 비용은 계속 올라갈 가능성이 있었다.
캐머러 씨는 아내가 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동안 집에 홀로 있었다. 홈 케어를 한다거나 너싱홈에 간다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캐머러 부인은 그렇게 해야할 날이 좀더 늦게 오기만을 희망했다.
그녀는 남편의 몫까지 맡아서 일을 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남편은 아직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다. 물론 더 이상 운전을 하지는 못한다. 남편을 차에 앉히면 아들이 남편을 봐준다. 아들은 올해 열여섯살이 돼 운전면허를 따려고 한다.
캐머러 씨가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처음 호소한지 10년이 흘렀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지는 5년이 지났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실의 큰 의자에 앉아 숫자퍼즐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에 두 번은 30~50대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모이는 프로그램에 참석한다. 거기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댄스시간이다.
그의 수학적인 능력은 아직도 살아 있지만 20년씩이나 알고 지낸 이웃을 알아보는 것은 거의 못한다. ‘난로(스토브)’처럼 인식이 안되는 사물들과도 더이상 씨름하지 않는다.
그는 이따금 아무 말도 없이 택시를 타고 가까운 골프장에 가기도 한다. 그러다 낯선 사람의 도움으로 집에 도착해서 아내의 애를 태우게 한다.
캐머러 부인에게 가장 힘든 일은 남편의 병으로 더 이상 둘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그녀는 “우리 부부는 함께 인생을 꾸려갔지요. 그런 시절은 이제 사라졌어요”하고 씁쓸히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