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배민욱 기자 = "술만 먹으면 폭력을 쓰는 남편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주부 A씨(35)는 지난 몇 년간 남편하고 맞벌이를 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그래도 남들은 알콩달콩 신혼부부처럼 산다며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A씨의 남편은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상하면 대화로 해결하기 보다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문제는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면 A씨에게 거친 욕을 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남편의 안 좋은 손버릇 탓에 머리가 찢어지고 다리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빨간멍자국이 남게 됐다.

어느날 남편의 거친 욕설에 참지못한 A씨는 화를 냈다. 참았어야 했는데 도저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남편은 분에 못 이겨 A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이것도 부족했는지 손으로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아직도 목에 선명한 멍자국이 남아있다. 이제는 화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온다. 흐르는 눈물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 같다.

"남편은 다시는 안그러겠다며 사과를 하지만 그때뿐이에요. 알면서도 멍청한 사람처럼 또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요. 이혼을 하고 싶지만 남편은 싫다는 말만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고 답답하네요."

가정폭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부부간의 폭력은 물론 부모에게 맞는 자녀들도 많아지고 있다. 가정은 핵가족화된 사회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돼야 할 곳이다. 그러나 가정이 폭력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어 우려스럽다.

실제로 가정폭력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가족내 구성원 절반 이상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가족부의 '2010 가정폭력 실태조사보고서'에서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9세 이상 65세 미만 성인 남녀 2659명 중 부부간 폭력을 경험한 비율은 53.8%로 조사됐다. 여성의 경우 51.3%가 가정폭력으로 인한 신체적 피해를 경험했다. 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을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경우도 30.1%에 달했다.

자녀에 대한 학대도 많았다. 18세 미만 자녀를 둔 1523개 가구를 조사한 결과 자녀학대 발생률은 59.1%로 집계됐다. 유형별로는 정서적 폭력이 52.1%로 가장 많았고 신체적 폭력(29.2%), 방임(17%) 등으로 순이었다.

노인부부의 가정폭력도 쉽게 치부할 수는 없다. 65세 이상 노인부부간의 폭력발생률도 31.8%로 분석됐다. 유형별로는 정서적 폭력이 23.9%로 가장 많았다. 방임(15.4%), 신체적 폭력(7.1%), 경제적 폭력 (5.3%), 성학대(3.1%) 등이 뒤를 이었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혼을 결심하는 여성 중 64.8%가 10년 이상 남편의 폭행에 시달려온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무료 소송구조를 통해 이혼에 나선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의 소송 301건을 분석한 결과 '매 맞는 아내'들의 혼인 기간은 10년 이상~20년 미만에 해당하는 경우가 111건으로 전체의 36.9%를 차지했다.

가정폭력의 피해유형은 폭언이나 욕설을 들은 경우가 96%로 가장 많았다. 이어 ▲주먹질이나 발길질(80.4%) ▲흉기로 위협(33.6%) ▲방망이 등 물건으로 맞은 경우(31.2%) ▲남편이 목을 조르거나 자신을 향해 흉기를 휘두른 경우(15.9%)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4월16일 오후 11시40분께 경기 평택시 팽성읍 김모(58)씨의 집에서 김씨와 김씨의 부인 양모(58)씨가 숨져있는 것을 아들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양씨가 친척을 시켜 남편을 납치해오게 한 뒤 월세를 주려고 비워놓은 방에서 남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을 매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평소 양씨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는게 그 이유다.

가정폭력으로 부모가 이혼한 뒤 시설에 생활하던 10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월9일 오후 8시46분께 광주시 남구 봉선동의 한 빌라 6층에서 A양(15)이 1층으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A양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려 부모가 이혼한 뒤 다니던 중학교도 중퇴하고 어머니·여동생 2명과 함께 쉼터에서 생활했다. 평소 "힘들다"라는 말을 여동생에게 자주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도 했다.

서울 동작경찰서는 1월25일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해한 손모(27)씨에 대해 존속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손씨는 같은달 24일 오후 4시께 서울 사당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서 아버지(59)와 다투다 목을 조르고 깨진 병을 휘둘러 아버지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손씨는 아버지가 평소 술을 많이 마시고 가정폭력을 일삼아 왔던 것에 불만을 품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전날에도 손씨 아버지는 만취 상태에서 아내를 심하게 때리고 아들과 다퉜다.

다문화가정에서도 가정폭력으로 인한 비극적인 사태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난달 27일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조선족 김모(57·여)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같은달 25일 오후 11시께 서울 미아동 자신의 집에서 남편 이모(57)씨에게 수면제를 넣은 국을 먹게 한 후 잠이 들자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6년 12월말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김씨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이씨와 지난해 5월 결혼한 후 1년여간 폭행에 시달려 왔다고 경찰은 전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남편이 이유 없이 폭행을 해 견디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을 당했을 경우 경찰이나 상담소를 찾아 교정 치료 등의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혼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초기에 신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가정폭력 발생이 우려될 경우 일단 현장을 피하고 신고를 통해 상담과 치료 등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스스로 자신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의 특성상 엄벌보다는 가정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부부간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도를 넘어섰다"며 "서로를 존중하는 가족 분위기 조성과 함께 부부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mkba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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