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대가 열리고 십여 두의 경주마가 주로를 질주한다. 관객이 환호하며 선두마에 시선을 놓치지 않는 사이 저만치 뒤에서 하얀 구급차가 간격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남들에게 경마는 즐기는 스포츠이지만 앰뷸런스 안 응급구조사들에게는 잠재적 사고의 현장(?)이다. 달려가는 경주마와 기수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혹자는 이들을 기수들의 생명줄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동차 경주의 10배나 사고율이 높다는 경마 경주이지만 구급차 안 그들이 있기에 기수들은 안심하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경마장에서 구급차는 사고가 났을 때 단순히 병원으로 이송하는 수단이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타 시도센터와 대기업에서 우리의 응급처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러 올 정도로 인프라도,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요."
크진 않지만 단단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응급구조사 1호, 전승철 KRA 응급센터장이다.
전승철 응급센터장은 아직도 12년 전 국립의료원에서 일하다 처음 한국마사회에 발을 들였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처음 봤던 게 말 새벽조교 모습이었어요. 어스름한 새벽에 주로를 환하게 조명으로 밝혀놓고 말들이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지요. 여기서 일하면 뭔가 다이내믹한 일들이 계속 기다릴 것 같아 설렜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경마장의 기수도, 경마 팬도, 심지어 그를 부른 마사회도 응급구조시스템에 대한 중요성을 평가 절하했고 갖추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마공원을 지금껏 지켰던 이유를 묻자 천상 응급구조사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병원에선 이미 1차 조치가 끝난 환자들만 접하게 되거든요. 마사회에 오면 1년에 수백 건이나 되는 현장 처치를 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외상파트에 욕심이 많았던 제게 여기만큼 적격인 직장은 없었어요."
경마공원에서 조치를 취해야 할 사고는 1년에 140~150건 정도인데 단순 낙마를 포함하면 500건을 넘는다. 이 중 새벽조교를 하다가 일어나는 사고가 전체의 9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하니 실제 경마 팬들이 경주 중에 보게 되는 사고는 10%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응급구조사의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경마공원에서 응급조치가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묻자 전승철 응급센터장의 말에 힘이 들어간다.
"교통사고는 에어백 등 안전장구가 구비되어 있지만 경주 중 사고는 무방비상태에서 당하게 됩니다. 사고 초기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이 경마장에서의 사고이지요."
3년 전쯤, 문세영 기수가 경주 중 말에 가슴을 채여 호흡을 멈춘 때가 있었단다. 당시 상황은 바로 한국마사회 임원들에게 보고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분주하고도 빠른 응급조치는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계속 진행되었고 병원에 막 도착하기 전에야 마침내 문세영 기수가 가는 호흡을 다시 이어나갔다.
자칫하면 더 큰 불행을 낳을 뻔 했던 큰 사건은 당일 퇴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결과로 끝났다. 신속한 응급조치의 힘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7년 전 박태종 기수가 1000m 경주 중 낙마하여 목을 크게 다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차하면 전신마비가 될 뻔한 큰 사고였으나 그 또한 응급센터의 덕을 보게 되었다.
박 기수가 병원으로 옮겨진 후 다급하게 달려온 그의 부인은 의사로부터 "환자가 운이 좋다. 현장에서 완벽한 처치를 한 덕분에 이 정도 부상에도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퇴원 후 한 아름 먹을거리를 싸들고 응급센터를 찾았음은 물론이다. 거듭되는 감사인사에 응급센터 직원들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경험이 거듭되면서 기수와 응급 구조사간의 신뢰는 두터워졌다. 응급센터의 덕을 본 기수들은 자신들이 나서서 응급조치의 중요성이나 안전장비 착장의 중요성에 대해 동료들에게 전파하고 다니게 됐다.
이제는 기수들이 달려야 할 때 구급차가 함께하지 않으면 그들은 주로를 나서지 않는다. 단순히 운송수단이었던 구급차는 그들의 생명줄이 되었고 업무관계 이상의 무엇이 됐다.
새벽조교 때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응급센터 구조사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기수나 마필관계자들이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구조사들의 생각이다.
경주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모든 것의 기준이 세워져야 믿었던 그들의 신념은 변화의 기류가 되어 기수에게도, 마사회 내부에도, 경마 팬들에게도 전해졌고 이제는 서울경마공원의 응급구조센터는 외부에서도 부러워할만한 최고의 응급처치시스템을 갖춘 공간이 됐다.
전승철 응급센터장은 대한민국 응급구조면허 1회 시험을 합격한 ‘응급구조사 1호’이다.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대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 이 직업을 선택했다"라고 말하는 그에겐 응급구조사가 천직이다.
기수와 마필관계자들은 그들의 가족이고 주로를 달리는 구급차와 경마공원 내 응급센터는 그의 자부심을 키워온 공간이다.
주말이면 질주하는 경주마와 기승한 기수 뒤 하얀 구급차에도 잠깐 눈을 돌려보자. 치열한 레이스 끝 경주마와 기수의 짜릿한 우승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그 뒤를 지켜준 그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