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경마공원 일요일 5경주(1300m)에서 한국경마 최고령 기수인 김귀배 기수가 감격의 1승을 기록했다.
김귀배 기수는 ‘용호약진’(한, 암, 4세, 13조 이희영 조교사)에 기승해 경주 초반 선행을 잡는데 성공했다.
김 기수는 차분히 선두를 유지하면서 경주를 전개해 나갔다. 한때 부민호 기수의 ‘다이옵사이드’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지만 김귀배 기수는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승선 직선주로, 이번엔 문세영 기수의 ‘강호탄생’이 후미를 바짝 추격했다. 하지만 김귀배 기수는 끝까지 선두를 잘 지켜내 17개월만의 승리를 기록했다. 경주기록은 1분 23.3초, 2위 마와의 도착차는 3/4마신이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김귀배 기수는 우승한 기수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세레모니 따위는 없었다. 그저 경주로를 향해 시선을 향하고 질주하는 경주마의 속도를 늦출 뿐 우승을 차지한 기쁜 내색은 찾기 힘들었다.
경주 직후 김귀배 기수는 "우승을 했는데 당연히 기쁘죠"라며 "좋은 말을 타서 우승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는 묵묵히 기수대기실로 향했다.
경마 관계자들과 후배 기수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축하를 건네 보지만 어색한지 머쓱하게 웃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경주가 모두 끝난 후 다시 찾은 김귀배 기수는 다소 안정된 상태(?)였다. 경주 후 다시 찾은 그는 비로소 17개월만의 승리를 느끼는지 한층 밝아진 얼굴이었다.
우승에 대한 소회를 물으니 "많이 기쁘죠. 후배들에게는 그냥 1승일지 몰라도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1승입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공식나이는 마흔일곱이다. 하지만 호적상 나이가 아닌 실제 출생년도(61년)를 감안하면 마흔여덟이다. 작년에 데뷔한 27기 3인방(김혜선, 박상우, 이기웅 기수)들이 88년생이니 이들과는 무려 27년 차이가 난다. 자식뻘 되는 후배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스포츠는 어떨까? 프로야구 최고령 선수인 ‘기록의 사나이’ 양준혁 선수가 41세이며 프로농구 최고령 선수인 ‘KBL 최고의 조연’ 이창수 선수 역시 41세이다. 프로축구 최고령 선수는 경남의 ‘노장 수문장’ 김병지 선수로 올해 40이다. 대한민국 3대 프로스포츠에서 최고참 격인 이 세 명의 선수들 모두 김귀배 기수보다는 한참 아래다.
조교사이던 친척의 권유로 기수라는 직업을 선택한 게 1979년, 그가 주로에서 말을 탄 지는 무려 31년.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동안 그는 한 결 같이 말 잔등 위에서 모래를 뒤집어쓰며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계속 달리게 하는 힘의 원천에 대해 "말을 좋아하고, 말 타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귀배 기수가 돈을 벌고 싶어서, 유명해 지고 싶어서 말을 탔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기수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좋은 말을 타든 나쁜 말을 타든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이기에 30여년 이라는 세월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1승을 올린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힘들지만 1980년대 그는 잘나가던 기수였다. 1986년 뉴질랜드산 명마 ‘포경선’에 올라 기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랑프리(GI)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대상경주의 운은 그 뿐이었다.
1989년 뚝섬에서 과천으로 경마장이 옮겨오면서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전문가들은 뚝섬과 반대인 경주 진행방향 때문에 슬럼프에 빠진 것으로 분석했다. 본인 역시 "뚝섬에 익숙했는데, 방향이 바뀌면서 적응이 안 되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슬럼프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승기회가 줄었다. 나이어린 조교사들이 껄끄러웠던지 말 주기를 꺼리게 되면서 기승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평생을 말 타기에 매진한 그였지만 기나긴 슬럼프는 그에게 포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슬럼프는 기회를 앗아갔고, 사라진 기회는 그를 더욱더 깊은 슬럼프로 몰아넣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주로를 떠날 수는 없었다. 말이 좋아 말을 타고, 평생 말 타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해본 일이 없는 그였기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기수이기에 앞서 2남 3녀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는 고삐를 더욱 세게 쥐고 말 등에 올라 내달렸다. 세월은 말보다도 빠르게 지나가 어느덧 그를 한국경마 최고령 기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단순한 의미의 최고령만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프로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라지지도 죽지도 않는 노장기수의 투혼은 오늘도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