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인] 황종환 논설위원 = 지난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겨울이 찾아온 듯 날씨가 추워졌다. 벌써 아침 기온이 전국 내륙을 중심으로 영하로 떨어진 곳이 많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체감온도가 낮아져 온몸에 한기가 스며든다.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딱 감기가 걸리기 십상이다. 두꺼운 겉옷을 꺼내 입고서 밖에 나오니 이제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한다.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복잡다단한 문제가 일어나는 세상사에 움츠러든 영혼이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풍경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다.
지난 봄날을 만끽하기 전에 여름이 일찍 시작되자 떠나는 봄이 아쉬워하며 푸념을 하였었다. 이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기온이 뚝 떨어지자 가을도 일찍 사라지는 아쉬움에 다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일상의 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강박과 불안에 빠져들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계절은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편이나 대가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앞서가고 멈춰서며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자연이다. 조금 늦게 왔다면 서둘러 다가가는 자연의 이치에서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얼마 전 발표된 10·15 부동산 대책의 후폭풍이 예상보다 거세고 오래 지속될 듯하다. 지난 문정부의 임기응변식 부동산 규제 정책을 답습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이번 대책에 대해 30대에서 가장 많은 부정적인 의견이 나타났다는 여론조사가 있다. 그만큼 미래의 불확실한 주택 문제가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신규 주택공급의 70% 이상이 재건축과 재개발사업에서 나온다고 한다. 공급을 가로막는 규제 위주의 정책보다 선제적인 공급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시장안정에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고려할 만하다.
요즘 언론과 방송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부 정치인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최소한의 국민에 대한 예의나 권력을 가진 책임 그리고 인간 본연의 겸손과 절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특히 이번 부동산 대책과 관련된 정부 고위층과 정치인들의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기본적인 예의나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국민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하루아침에 날벼락 같은 이번 대책으로 절망과 분노에 빠진 일반 국민들의 걱정과 불안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고려했다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기본과 예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정치는 정책이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본과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수록 기본이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것이 문제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완장을 찬 듯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모습이 우려스럽다. 이제 정권의 주축인 정부 고위층과 여당 의원에게 부메랑이 되어 다가오는 형국이다. 기본이 무너진 정치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매슬로(A.H. Maslow)가 전개한 욕구 5단계에서 인간의 동기는 다양한 욕구의 계층에 따라 순차적으로 생겨나고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상위 계층의 다른 욕구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기본적인 의식주라는 생리적 욕구가 최하위단계다. 대체로 사람들은 주거환경이 좋은 지역이나 생활이 편리한 곳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택의 실제 수요층의 기본적인 욕구를 탐욕이라는 단어로 몰아붙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
몇 년 전 제주도 겨울여행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진작가 김영갑은 20여 년 동안 고향을 찾지 못했을 정도로 제주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남은 일생 동안 그곳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전시를 준비하지만 전시회에 아무도 초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작품을 걸어놓고 혼자 생각에 잠긴 뒤 다음 작품을 준비하였다. 방안에 동백꽃을 꽂아두었더니 열어둔 창문으로 작은 동박새가 무심코 들어와서 허둥대다가 전시된 사진을 꼼꼼히 둘러보듯, 우연히 발길에 이끌려 이곳으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이 동백꽃이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말없이 침묵하며 사랑과 겸손, 그리움으로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나는 동백꽃을 가장 편안한 친구라고 여겼을 것이다. 황홀한 절정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없이 같은 장소를 찾아가고 한없이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미리 생각하고 그려놓은 풍경을 찾아 이곳저곳 헤매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 번의 셔터를 누르기 위해 아파하며 참아낸 시간들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인기척조차 없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 같은 한적한 동네 골목길을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찬찬히 걸어간다. 알찬 곡식이 햇볕 내리쬐는 마당 한구석에 널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텅 빈 가슴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낮은 울타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밭이랑에 풍성한 배추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다. 이곳에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고풍스런 나무 대문에 달린 검푸른 녹물이 스민 자물쇠에 세월의 향기가 담겨있다. 때가 차면 스스로 푸른빛을 덜어내고 몸을 비워내는 신비로운 계절의 변화가 정말 놀랍다.
한겨울에 푸른 잎을 간직하고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에서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느껴진다. 활짝 핀 동백꽃을 상상하는 순간 세상사에 지친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곳의 동백 정원이 그립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고정된 이미지와 색깔을 틀에 맞추려는 자세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법이나 정책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적 명제를 다시 되새겨야 할 때다. 기본이 제대로 지켜지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희망고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늦가을 향기가 아직도 그윽한 자리에서 넉넉하지는 않을지라도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초겨울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