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성 만찬장에서 벌어진 ‘무언의 외교극’

[뉴스인] 김효헌 =2025년 9월, 윈저성(St. George’s Hall)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은 단지 한 끼 식사를 넘어섰다.
이것은 고요하지만 강력한 외교적 선언이었고, 은근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의 연출이었다.
화려한 촛불과 정갈한 유리잔 사이에서, 영국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 자리를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만찬 메뉴에 숨은 ‘정치적 미각’
이날 만찬엔 160명이 초대되었고, 손님 한 명당 다섯 개의 유리잔, 총 1,452점의 식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메뉴는 프랑스어로 인쇄되었고,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햄프셔 워터크레스 판나코타: 파르메산 쇼트브레드와 메추리알 샐러드
노퍽산 유기농 닭고기 발로틴: 애호박으로 감싸고 허브 소스 제공
바닐라 아이스크림 봄베: 켄트산 라즈베리 셔벗과 빅토리아 자두 곁들임
여기까진 품격 있는 유럽식 코스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음료 리스트에서 드러난다.
1945년산 포트 와인: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임을 상징하며,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떠오르게 한다.
1912년산 코냑: 트럼프 어머니(스코틀랜드 출신)의 출생 연도를 의미
Transatlantic Whisky Sour 칵테일: 영국의 마멀레이드, 미국의 피칸, 위스키가 어우러진 ‘대서양 동맹’의 상징적인 음료
이 만찬은 분명히 미각으로 전하는 외교적 은유였다.
누가 앉았고, 누가 빠졌는가?
왕실 행사에 자주 보이던 엘튼 존, 데이비드 베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기술·금융·정치계의 실세들이었다.
- 트럼프는 찰스 3세 국왕과 케서린(웨일스 공작부인) 사이
- 멜라니아는 왕세자 윌리엄과 카밀라 왕비 사이
- 팀 쿡(Apple CEO) 은 티파니 트럼프 옆
- 샘 알트먼(OpenAI) 은 보수당 대표 케미 바데노흐 옆
- 루퍼트 머독은 영국 총리 스타머의 참모 옆에 착석 — 트럼프가 현재 머독 언론사와 소송 중인 점을 고려하면 흥미로운 구성이다.
누구와 함께 앉았는가, 혹은 함께하지 않았는가는, 때론 어떤 말보다 강력한 외교적 언어가 된다.
선곡과 드레스, 감각의 언어로 말하다
만찬에서 흐른 두 곡은 단순한 취향 이상이었다.
Nessun Dorma (“그 누구도 잠들지 마라”)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항상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다”)
누구에게 던진 메시지일까? 트럼프에게? 정치인들에게? 아니면 세계 전체에 대한 현실 인식?
의상도 하나의 메시지였다.
케서린은 고(故) 다이애나비가 즐겨 착용하던 러버스 낫 티아라를 착용 — 왕실의 연속성과 품격을 상징
멜라니아 트럼프는 강렬한 노란 드레스로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 미국식 자율성과 개성의 표현
왕실은 언제나 그랬듯, 말 대신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우리는 이 만찬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이 만찬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외교는 정말 회담장에서만 이뤄지는가?”
진짜 외교는 때로는 와인잔 너머에서, 좌석배치 사이에서, 촛불 아래에서 이뤄진다.
왕실은 이를 잘 알고 있고, 트럼프는 그 무대의 중심에 앉았다.
트럼프는 그날 저녁 윈저성의 중앙에 앉았지만, 그를 둘러싼 테이블은 영국이 만들어낸 정교한 대본 없는 연극이었다.
화려한 접대 속에 숨어 있는 상징, 그 상징에 담긴 외교적 계산.
이번 국빈 만찬은 보여주었다.
왕실은 여전히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말할 줄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