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헌의 스코틀랜드이야기

[뉴스인] 김효헌 =“우리는 벗는다. 자유롭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누드 문화, 이른바 ‘나투리즘(Naturism)’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부활하고 있다.
놀라운 건 그 주도 세력이 중·장년층이 아니라 20~30대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더 이상 누드를 자유와 해방의 구호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전신 태닝, 몸 긍정주의, 친환경적 삶이라는 실용성과 가치 중심으로 접근한다.
툴롱 근처 외딴 해변에서 만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한다. “전신이 아름다워지고 싶어요. 그래서 벗어요.” 그 말은 가볍게 들리지만, 그 속에는 자기 몸에 대한 주도권이 있다.
나투리즘은 단순한 노출이 아니다.
지금 프랑스에서는 누드로 전시회를 관람하고, 비치발리볼을 하고, 박물관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한다.
심지어 자정에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나체 수영’ 인기는 일부 수영장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몸과 공간,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흐름이다.
옷을 벗는 것이 곧 내면을 벗는 것이라는 고전적 의미는 이제 실용성과 감각적 취향 속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 조사에 따르면, 18에서 34세의 37%가 나투리즘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이는 부모 세대보다 약 15% 더 높은 수치다.
이처럼 누드 문화는 특정 취향이 아니라, 세대적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흐름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150개의 나투리즘 해변이 있다.
이러한 흐름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마르세유에서는 여성들의 나체 사진을 몰래 촬영한 남성이 체포되었고, 리옹 근처에서는 부적절한 행동을 제지하던 한 노인이 총격 사건에 휘말렸다.
자유와 관음증, 개방과 범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나투리즘이 말하는 자유는 타인의 경계를 존중할 때만이 온전하다.
누드는 해방이지만, 결코 무질서나 면죄부가 아니다.

프랑스의 나투리즘 연합은 이를 단순한 노출이 아닌 “철학적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환경과 가까워지고,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내 몸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는 삶.
영국에서는 아예 아이들을 누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이 가장 좋은 성교육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가 몸을 수치로 가르쳐온 교육과 문화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몸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더 나은 성의식과 자존감을 만든다.
프랑스의 누드 문화는 단지 벗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몸과 자유, 공동체와 윤리의 새로운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실험이다. 우리는 과연 ‘벗은 몸’을 부끄러움이나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아야 할까? 혹은, 자연스럽고 평등한 존재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나투리즘은 그 물음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