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진정한 국민통합을 위한 선택의 순간
반복되는 통합의 실패, 그 뿌리를 찾아서

박병규 논설위원. (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집행위원장, 전 중앙일보 기자)
박병규 논설위원. (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집행위원장, 전 중앙일보 기자)

[뉴스인]  박병규 논설위원 = "국민 대통합." 이 문구는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정부가 내세운 국정 구호였다. 이승만의 반공 통합, 박정희의 경제 통합, 전두환의 안정과 화합, 김영삼의 문민 통합, 김대중·노무현의 지역 통합, 이명박·박근혜의 실용과 국민 통합,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공정과 포용, 윤석열 정부의 자유와 연대까지. 그 어떤 대통령도 국민 앞에서 "분열을 추구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 많은 '통합'의 외침은 하나같이 깊은 분열과 불신으로 귀결되었는가? 왜 '통합'은 매번 선거의 수사에 머물고, 통치의 원리로 구현되지 못했는가?

이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금, 우리는 또다시 '민생회복과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서 있다. 12.3 계엄령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헌정 위기를 겪은 후 맞이한 새 정부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과연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통합 실패의 본질: 정의 없는 화해의 구조

그 핵심은 명확하다. 대한민국의 통합 담론은 한 번도 '정의' 위에 세워진 적이 없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미군정과 보수 정치 세력의 묵인 하에 좌절되었다. 친일 세력이 오히려 국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군사독재 시기, '국민 화합'은 비판 세력을 억누르는 장식적 언어로 쓰였고, 민주화 요구는 분열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문민정부 이후에도 지역 감정과 이념 갈등 해소를 외쳤지만, 정치 기득권은 오히려 갈등을 선동해 권력을 강화했고, 정권 교체는 곧장 사법 처리와 정치 보복 프레임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통합은 늘 정치적 구호로는 존재했으나, 구체적인 정의 회복이나 구조 개혁 없이 추진되었기에 기만적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끌어안자'는 말은 많았지만, '누가 무엇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꺼려졌다. 그 결과, 우리는 피해자의 침묵 위에 가해자의 안정을 세우는 '거꾸로 된 통합'을 반복해왔다.

역사의 무게 앞에서 선 이재명 정부

이제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국민의 기대는 분명하다. 무너진 민생을 바로 세우고, 극단의 분열을 넘어 국민을 하나로 모아 달라는 절박한 요청이다. 그러나 출범과 동시에 우리는 중대한 선택지 앞에 섰다. 바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려 한 내란 기도 세력에 대해, 어떤 정치적·법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이다.

일각에서는 말한다. "이제는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 정치보복은 안 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말한다. "책임을 묻지 않으면 정의는 실종되고, 통합도 위선이 된다."

이 두 주장 모두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진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정의 없는 통합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통합이 지속 가능한가?

정의는 통합의 적이 아니라 전제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는 이런 딜레마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제시해왔다. 전후 독일의 과거사 청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스페인의 '망각의 협약', 칠레의 점진적 이행정의 등 각국은 저마다의 상황에 맞는 길을 모색해왔다.

이들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는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 그리고 사회적 화해가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건강한 통합은 반드시 책임의 분명한 확인 위에서라야 가능하다. 내란 기도와 헌법 파괴, 국민 기망과 공권력 왜곡에 대한 사법적 책임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면, 통합이란 그저 '공범의 침묵'에 불과하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 공동체가 무책임한 침묵과 묵인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를 경고했다. 한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내란의 시도가 법의 이름으로 단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방조이며, 민주공화국의 자살이다.

정치보복과 정치정의는 다르다

이 시점에서 정치보복과 정치정의를 구분하는 분별력이 절실하다. 정치보복은 사적인 복수이며, 정치정의는 공공의 신뢰 회복이다. 정치정의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진실 규명이 모든 출발점이어야 한다. 12.3 사태에 대한 철저하고 객관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누가, 언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명확히 밝혀져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후속 조치가 가능하다.

둘째, 법치주의 원칙의 일관된 적용이 필요하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행위에 대해서는 정치적 고려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법에 따른 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그 과정은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며, 정치적 복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비례성의 원칙에 따른 차등적 접근이 중요하다. 책임의 정도와 역할에 따라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핵심 기획자와 단순 가담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넷째, 반성과 회복의 제도적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법적 처리가 완료된 후에는 이들을 다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의 정신도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처럼 적폐청산을 정치적 보복으로 오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법적 절차에 따라 냉정하고 투명하게, 헌법 파괴 행위의 책임을 명확히 가려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통합을 시작할 시간이다

우리는 매번 통합을 외쳤지만, 실상은 고통을 외면한 채 '적당히 넘어가는 것'에 익숙했다. 이제는 그 방식을 바꿔야 한다. 잘못된 과거를 직시하고, 헌법의 권위를 회복하며,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 그 위에서만 진짜 통합, 즉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민 공동체"가 가능해진다.

아울러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비상사태 관련 헌법 조항의 명확화, 군의 정치적 중립성 강화, 언론의 독립성 보장 등 구조적 개선 없이는 재발 방지가 어렵다.

무엇보다 시민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가치와 헌정질서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지켜지지 않으며,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과 참여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품위 있는 정의, 지속가능한 통합을 향하여

이재명 정부는 선언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도 보복하지 않지만, 헌법 파괴의 책임에 대해서는 끝까지 묻겠다. 그리고 반성과 회복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리하여 정의로운 질서 위에 포용의 정치를 세울 수 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반복되는 분열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덮어두고 가는 소극적 화해가 아니라, 진실을 마주하고 정의를 세우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적극적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민주주의 유산이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통합의 이름으로 가능한, 가장 품위 있는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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