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Feat by 소크라테스
[뉴스인] 김태현 = '본 평론은 나홍진이 각본, 연출한 세 편의 장편-‘추격자’, ‘황해’, ‘곡성’-을 중심으로, 그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공시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나홍진 영화의 주제의식은 크게 ‘부성애’, ‘악마성에 대한 탐구’, ‘마초주의에 대한 반성’, ‘극사실주의적 묘사’, ‘추격씬’, ‘형식주의에 대한 조소’ 로 요약될 수 있다. 나홍진의 장편들은 모두 주제나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지명을 주된 공간 배경으로 하거나 제목으로 활용하는데, ‘망원(望遠)’ 은 ‘정신 차리고 멀리 보라’ 이고, ‘황해(黃海)’ 는 ‘탁하고 거친 누런 바다’ 이며, ‘곡성(哭聲)’ 은 ‘우매한 세상에 장례를 고하는 소리’ 다. 그리고 나홍진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다. 이유는 단 하나! 뭣이 중헌질 모르는 의심병에 걸려서다. 뭣이 중헌지 몰라서 아프다는 여인의 말을 의심하고(‘추격자’), 뭣이 중헌지 몰라서 돈 벌러 간 아내를 의심하고(‘황해’), 뭣이 중헌지 몰라서 외지인과 마을의 수호신을 의심한다(‘곡성’). 바리새인처럼 의심하고, 악에 현혹돼서 죄를 지으니 구원은 당연히 요원해진다. 나홍진은 이 같은 주제 의식을 현실 비관적 세계관을 함축하는 공간 안에서,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 군상들을 끊임없이 희롱하는 악마와 그에 맞서는 부성애적(그리고 모성애적) 인물 간에 벌어지는 극한 대립을, 극사실주의적 묘사와 박진감 넘치는 추격씬을 통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지옥도로, 여인을 의심하고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는 마초들의 초상으로 그리고 형식과 타성에 얽매인 체 뭣이 중헌 줄 모르고 헛발질만 해대는 관료적 만화경으로 드러낸다.
본 평론은 작가가 이 같은 씨실들 위에 한 땀, 한 땀 일관되게 기워 낸 날실들을 풀어 헤친 후, 그 안에 직조해 놓은 의식의 결들을 공시적 맥락 안에서 개인,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적 담론의 손길로 쓸어 볼 것이다. 작가의 진단대로 뭣이 중헌 줄 모르고 허주(虛主)에 현혹돼 개병 걸린 세상을 위한 구원의 단초를 찾기 위해서다.
1. ‘추격자’, 악마의 씨

헐리웃에서는 ‘싸이코(1960)’, ‘텍사스 기계톱 대학살(1974)’, ‘양들의 침묵(1991)’ (모두 ‘시어도어 게인’ 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 등 사이코 연쇄 살인마 이야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된 소재가 되어 온 반면, 충무로에서는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살인의 추억(2003)’ 에 이르서야 비로소 사이코(혹은 소시오) 패스 범죄물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추격자’ 는 특히 ‘살인의 추억’ 의 박현규처럼 쥐 한 마리 못 잡을 거 같은 이미지의 지영민을 연쇄 살인범으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영민은 성(性) 불감이라는 남성적 콤플렉스로 야기된 자신의 욕구 불만을 여성이라는 욕망의 투사물에게 ‘징(성기를 상징)’ 을 박는 잔인무도한 행위를 통해 충족시키는 탐욕형 살인마다. 작가는 동시에 집단적 양심 불감에 걸린 인간 군상들-콜걸, 포주, 국회의원, 검사, 경찰 등-을 절망적 현실이라는 구도 안에 지영민과 대비시켜 놓는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의 죄를 각성한 비리 경찰 출신 엄중호라는 포주를 통해 구원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시하는데, 엄중호를 각성 시킨 건 다름 아닌 부성애다. 엄중호는 사실 아프다는 김미진의 말을 의심함으로써 모든 비극을 촉발시킨 원죄적 인물이다. 하지만, 일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미진의 행적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미진의 딸을 알게 되고, 일말의 동정과 책임을 느끼게 됨으로써 속죄의 기회를 얻게 된다.
‘추격자’ 는 특이하게도 진범을 밝혀나가는 과정에서의 반전에 초점을 맞추는 다른 스릴러와는 달리 초반부터 범인의 존재를 노출 시킨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 확보를 위해 지영민의 거처를 찾는 과정에서 경찰 집단의 양심과 기능의 허술함을 폭로하며, 헛다리만 짚고 다니는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의 병폐를 긴장 어린 상황 속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통해 묘사한다. 이들은 탐욕과 이기심 혹은 독선과 형식에 사로잡힌 죄인이거나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며, 풍요 속 빈곤과 욕구 과잉 속 욕구 불만을 양산하는 비틀린 사회 구조는 그 죄의 온상이다. 한편, 망원동은 끔찍한 연쇄 살인이 벌어지는 달동네지만, 그 안의 어둠을 밝히는 십자가는 구원이 가능하다는 암시를 던져준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십자가 너머의 진실(범인의 거처)을 보지 못한 체, 다 잡은 범인마저 자유롭게 풀어주며 종래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추격자’ 에서는 제목처럼 수 없이 많은 추격씬이 반복되는데, 범인의 거처에서 간신히 탈출한 미진이 달동네 슈퍼에서 중호에게 전화 걸기 전 추격씬은 기승전결 구조에서 ‘전’ 에 해당하는 클라이막스의 변곡점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전(轉, turn) 장면의 추격씬이라는 국면적 패턴은 십자가와 교회(그리고 성당, 무당집)이라는 종교적 암시와 더불어 ‘황해’ 와 ‘곡성’ 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작가는 특히 주인공들의 감정이 극대화 되는 씬에서 배경 음악 혹은 소리(호흡이나 비와 같은)만을 남겨둔 체 무음 처리함으로써 감정 증폭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 김미진이 죽었다고 확신한 딸의 비 속 울음 장면이 그 예인데, 이 같은 클리셰는 ‘황해’ 와 ‘곡성’ 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아무튼 세 장편 중 ‘추격자’의 엄중호만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부성애를 각성한 후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황해’ 의 개병 걸린 김구남은 끝내 아내의 진실을 알지 못한 체 아내를 의심하다 죽었고, ‘곡성’ 의 전종구는 결정적 구원의 기회가 있었으나 자신의 의심병 때문에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엄중호만 유일하게 의심한 죄에 대한 대가를 수난과 고행으로 치른 후, 자신의 손으로 악마(지영민)를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격자’ 는 이후 나홍진 작품에 등장할 다른 악마들-사회 정치적 비극이 잉태하고, 신화와 종교적 상징으로 구체화된-의 전조에 불과하다.
2. ‘황해’, 악마의 유혹

‘황해’ 는 조선족과 ‘개병’ 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후 ‘곡성’ 에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영화 처음부터 밝히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심한 관객의 심리를 적절한 맥거핀을 활용해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작가가 맥거핀을 본격 활용하는 건 ‘황해’ 부터인데(김구남 부인과 닮은 김승현 부인 혹은 김태원 내연녀 그리고 조선족 여인 토막 살인, ‘곡성’ 에서는 무명, 일광, 굿 장면 등), 이 때문에 작가의 미끼를 덥석 문 관객들은 머리가 뒤죽박죽된 기분을 느끼며 극장문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황해’ 는 한 마디로 생 날 것의 영화다. 밑바닥 음지의 원시성, 피와 살이 난무하는 야수적 폭력, 히스테리컬한 성적 욕구의 분출이 황해라는 사바(娑婆, sahā)의 바다를 역한 비린내로 가득 채운다. 동시에 ‘황해’ 는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소재적 독립을 시도한 작품이자, 범죄 영화에 챕터식 플롯을 활용한 실험작이기도 하다. 헐리웃에서는 티란티노 등의 성공 사례가 있었지만, 충무로에서는 범죄물이 챕터식 플롯으로 꾸준히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넘버3(1997)’, ‘타짜(2006)’, ‘신의 한수(2014)’ 정도만 손에 꼽힌다. 아무튼 ‘황해’ 덕분에 이후 충무로에서는 ‘공모자들(2012)’, ‘신세계(2013)’, ‘미씽(2016)’ 등 조선족이 주된 비중으로 등장하는 장르물이 속속 제작되기도 했다.
‘황해’ 는 일면 한반도의 정치 사회적 비극이 잉태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부초 같은 이방인의 외로움과 절망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 비극의 직접 원인은 역사적, 정치적 기제가 아닌 주인공 자신에게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빚을 갚기 위해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를 구남이 다른 사람 말이나 헛소문만 믿고 의심한 데서 악마(면정학)의 현혹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린내 나는 누런 바다는 구원 없는 현실을 상징하며, 영화 초반 바다에 수장되는 밀입국 여인의 모습은 구남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복선이다. ‘곡성’ 의 종구와 마찬가지로 의심병-본인 스스로는 ‘개병’ 이라 했다-에 걸린 그 순간부터 구원의 약속은 떨어져 나간다. ‘추격자’ 의 중호는 자신에게 없던 부성애를 각성하고 미진의 진실을 확인함으로써 구원을 얻었지만, 애초 부성애로 길을 나선 구남에게는 몰아치는 악마의 배신과 공격 때문에 그걸 상기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오히려 급박한 위기 속에서조차 변함없이 계속됐던 것은 아내에 대한 의심이었다. 아내를 사랑한 것은 분명했으나, 끝내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내연남에게 살해당했구나.’ 라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된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 어찌됐건 구남을 귀향길 어선까지 살아서 오르도록 이끈 힘은 부성애였다. 하지만 손에 쥐고 있던 남자 아이의 사진을 놓치는 순간 구남의 부성애는 각하됐고, 의심한 죄에 대한 벌은 어김없이 가해졌다. 주인공의 처지와 상황은 안타깝지만, ‘추격자’ 처럼 심판은 냉정했다. 조선족의 역사적 비극은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 크지만,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놓친 개인의 몽매함에, 비극에 대한 더 큰 책임이 있다라는 판결 요지가 추상과 같다. 해서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에게는 감정적 여운에 마냥 젖어 있기보다 이성적 각성을 스스로 환기시켜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황해’ 에서 ‘추격자’ 의 두 배우-김윤석과 하정우-가 주인공 역할을 바꿔서 등장한다라는 점이다. 이 같은 감독과 배우의 페르소나는 ‘황해’ 에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곽도원이 ‘곡성’ 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일관성 있게 이어진다. 아무튼 ‘황해’ 는 누런 바다처럼 더럽고 혼탁한 사바 세상과 자신들의 탐욕과 의심으로 사바의 공간(황해와 곡성)을 만든 몽매하고 이기적인 군상들에 대한 악마의 공격이 본격화 됐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다음 영화에서 대 놓고 말한다. 현혹되지 마라고.
3. ‘곡성’, 악마의 습격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 이승이 바로 지옥이다” -‘라쇼몽’ 中
‘곡성’ 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악마의 말이 같고, 부활한 악마의 손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징 자국이 있다. 이쯤 되면 마음에 의심을 품은 인간이 악마인지 아니면 예수의 현시인 악마가 혹은 예수인 척 하는 타락한 어부 베드로가 어리석은 인간을 시험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곡성’ 은 ‘황해’ 의 비린내와 ‘망원동’ 의 어지러움이 가득한 사바세계의 축소판이다. 일본 출신 외지인이 영화 초반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꾀는 장면은 미끼를 물 어리석은 인간을 낚는 타락한 천사 혹은 베드로에 대한 암시이다. 그런데 일광의 말처럼, ‘버럭지 같은 놈(전종구)’ 이 ‘미끼’ 를 삼켜버렸다. 이는 악마의 유희가 성공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의심병 걸린 버럭지 같은 놈은 마수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는 무명의 노력마저 마지막 순간에 져버리고 만다. ‘추격자’ 에서 각성한 인간에게 저지를 당한 악마(영민)나 ‘황해’ 의 다른 악마(김태원)와 싸우다 제 풀에 죽은 악마(면가)와는 달리, 버럭지 같은 놈, 종구는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악마(외지인과 일광)의 그물에 걸려들어 실상의 자리를 내주고 만다. 영화 말미 등장하는 외지인과 일광의 사진 찍는 행위는 인간이 믿었던 실상과 허상의 역전 현상, 즉 허주(虛主)의 승리를 상징한다.
한편, ‘곡성’ 에도 어김없이 독선과 형식에 집착하는 바리새인(어리숙한 공권력)에 대한 희화화, 다양한 성경적 상징,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전(轉, turn)의 추격씬, 무음 처리를 통한 감정의 극대화 같은 작가적 루틴이 등장한다. 하지만, 플롯의 짜임새는 이전 영화들보다 정교해졌고, 악마가 생고라니 뜯어 먹는 걸 육회 먹는 씬으로, 두드러기 투성이의 검붉은 사체를 탄고기로 연상시키는 어트랙션 몽타쥬도 선보인다. 영화의 주제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경지를 넘어 종교적, 신화적, 철학적 차원으로 이동하는데, 작가는 일광의 이름, 악마와 일광이 착용한 훈도시 그리고 야생화와 까마귀, 돌 등을 통해 각각 악마와 일광이 한패이고, 무명이 마을 편임을 적극적으로 암시한다. 하지만, 일광과 악마의 굿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교차 편집과 무명이 희생자들의 옷과 물건을 지니고 있는 맥거핀을 통해 관객을 의도된 혼란에 빠트린다. 그래서 관객은 종구처럼 끝까지 ‘누가’ 내 편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외지인을 의심했기 때문에 종구의 비극은 시작됐고, 마을의 수호신인 무명을 또 의심해서 종구의 비극은 완성됐다. 종구와 같은 감정선을 따라간 관객 역시 마찬가지 좌절감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의심하지 마라고, 현혹되지 마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다.
나아가 이전 두 작품에서 보여진 성경적 세계관은 ‘곡성’ 을 통해 무교(舞敎)적 혹은 불교적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그 준거점이 바로 의심하지 않는 마음, 현혹되지 않는 이성, 진리를 오롯이 아는 것, 즉 견성(見性)이다. 이는 노에마(대상)에 대한 노에시스(의식)가 발생하기 전에 본질을 직관하는 환원적 사고에 그치는 것이 아닌, 대상과 인식, 선과 악 등으로 고정된 이원론적 경계를 초월해서 프랙탈적 현실에 당면할 때마다 맥락을 인지하고 진실을 판단하는 순환적 사고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 속 부활한 악마와 일광의 불상은 신과 악마(그리스도와 외지인 혹은 부처와 일광)가 동일시되거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불확정성을 암시하며, 몽매하고 죄 많은 사바의 바다 곡성에서 악마의 그물에 걸리지 않을 유일한 통로는 인간 자신의 각성뿐임을 역설한다. 오롯하게 마음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직접 보고도 의심하는 감정의 동요를 제거하고 거짓에 현혹되지 않는 명철한 이성을 지킬 때만이 구원으로 통하는 자성의 등(燈)이 켜진다. 하지만, 종구는 진실(무명)을 의심하고, 거짓(일광)에 현혹됐다. 어둠(무명, 無明)이 실은 빛이고, 빛(일광, 日光)이 실은 어둠인데, 허주에 홀려 닭이 세 번 울면 찾아올 어둠 다음의 빛을 마저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추격자’ 에서는 인간이 악마를 간신히 저지했다. ‘황해’ 에서는 인간과 악마 모두 죽었다. 그리고 ‘곡성’ 에서는 악마가 인간을 처참하게 눌렀다. 이 같은 결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각성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의심하지 마라고 단단히 이른다. 포스터 카피조차 현혹되지 마라이다. 신성을 의심하고 악마성에 현혹된 인간은 결국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의심한 것처럼, 의심해선 안 되는 사람(미진과 부인)이나 존재(외지인)를 의심한 죄에 대한 댓가는 구원 없음이라. 결국 ‘곡성’ 은 천사와 악마의 존재마저 불분명해지는, 즉 다시 말하면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마저 어려워지는 혼돈의 아수라인 현실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적 세상도, 불경적 세상도,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온전한 신도, 온전한 악마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바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한 구원은 의심하지 않는 마음, 현혹되지 않는 이성 그 자체라고 강변한다. 각성만이 무지한 인간 스스로 만들어 놓은 출구 없는 지옥, 가헤넘을 탈출하는 유일한 초월임을 말이다.
자, 눈 먼 세상에 조롱하듯 던지는 악마의 질문을 다시 떠 올려 보자. 뭣이 중헌디? 나홍진 영화 속 악마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자, 답을 주는 존재다. 그리고 여기서 신과 악마의 진위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악마(혹은 악의 화신)인가? 천사(혹은 선의 화신)인가? 대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다. 자,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선과 악 혹은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에 대해서 확신은 있는가?
나홍진은 나름의 답으로 부성애를 던져 놓았다. 바로 선의지다. 의심이 사라진 명징한 마음에만 현혹되지 않는 이성이 자리 잡을 수 있다. 그것을 추동하는 힘이 선의지다. 끝없는 반성을 통해 달라진 존재성을 각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선택에 대해 확신하고, 그 결과를 기꺼이 책임질 수 있게 된다.
아쉽게도 나홍진 영화는 모두 해피 엔딩이 아니다. 앙켈로플로스처럼 안개 속 어렴풋한 희망의 나무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밀레니엄 이후 신세기 초입에 서 있지만, ‘천상의 피조물(1994)’, ‘둠 제너레이션(1995)’ 처럼 이상과 여전한 괴리감이 있는 비관적 현실 인식, 그것이 나홍진 영화를 관통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