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진실에 있다.’

지난 2월 23일 러시아 ‘조국수호의 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군가를 연주하는 악사들
지난 2월 23일 러시아 ‘조국수호의 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군가를 연주하는 악사들

[뉴스인] 김태현 기자= 러우전쟁이 발발할 때도 그랬고, 전쟁 중인 현재도 보통의 러시아인들이 가장 슬퍼하는 부분은 자신들의 형제나 다름 없는 사람들과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현실이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에겐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에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친인척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이유로 지금 당장 내 이모나 삼촌에게 총을 겨눠야 한다면, 나의 형제에게 원치 않는 폭력이나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런 불행한 상황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상적인 사고나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런 결정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푸틴 같은 비이성적 사고, 망상적 감정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명분 없는 전쟁에 찬성할 뿐이다. 러시아 현지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전쟁과 징집령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심지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꺼렸다. 거리에 있는 시민군이나 군인들 보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푸틴 유고 시 닥칠 자국의 혼란 상황과 지금의 전쟁 상황 중 어느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공포가 더 클지에 대해 궁금함을 느낀다. 나의 한 친구는 1990년대 생인데, 그녀 말에 의하면 1990년대는 러시아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힘들고 위험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갑작스레 나라가 망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911226일 철의 장막 소련은 예고도 없이 붕괴됐다. 러시아 내부는 당연히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경제와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강도 및 살인 사건이 빈번했으며, 사람들의 삶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먹고 살기 힘들어 공부할 여유가 없어 경쟁이 적다 보니 대학에 입학하기도 쉬웠다는 게 그 친구의 전언이다. 이런 유년 시절을 경험했던 그녀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국가가 해체되거나 내란에 휩싸이는 상황은 그래서 극도로 공포스럽고 피하고 싶은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현재를 사는 러시아인들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공포인 셈이다. 전쟁 직전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러시아 지인들은 너 나 없이 모두 지금은 21세기다. 이런 시대에 전쟁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됐고,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전쟁은 일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직접 맞닥뜨리게 된 러시아인들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심정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강하게 표출하지 않았던 침묵을 앞으로도 과연 지속할까? 푸틴의 폭주를, 푸틴 정권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언론에 대한 탄압과 여론 조작을 계속 묵인하기만 할 것인가? 핵 버튼을 손에 쥐고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의 독단과 망상에 사로잡힌 노인네에게 인류 미래의 상당 부분을 맡겨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개인적으로 푸틴 유고 시 닥칠 미래의 혼란 상황과 지금의 전쟁 상황 중 어느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공포가 더 클지에 대해 궁금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만약 후자가 더 크다면 러시아인들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푸틴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하게 될 것이다(내가 처음 이 글을 작성했을 당시 러시아 제 2의 도시 상트페테부르크에서는 공식적으로 뉴스에 보도되진 않았지만 중심가인 넵스키 대로에서 징집령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럼 전쟁 상황은 반전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파들에 대한 푸틴의 억압이 더 세져 러시아 내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혼란 상황을 이용해 미국이나 유럽 연합 같은 서방 세력은 러시아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은밀한 작전들을 강력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럼 결국 러시아는 다시 한 번 국가 붕괴, 체제 붕괴라는 현실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우크라이나나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 진영에는 분명 좋은 일이다. 중장기적으로 보자면 독재자가 사라지고 권위주의 체재가 붕괴되는 현실은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서방의 입장만을 반영한 다분히 이상적인 시나리오일 뿐이며, 암울했던 1990년대를 경험했던 대다수의 러시아 사람들은 그 시절의 고생과 혼란을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설령 러시아가 다시 철의 장막이 되어 예전의 소련 시절로 돌아가거나, 그 보다 더 참혹한 푸틴이라는 짜르의 전제 군주 시대로 접어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미 예전엔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자유와 편리를 경험했던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저항보다는 보다 더 안전하고 자유로운 외국의 국가로 떠나는 선택을 선호한다. 혹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적 안정만 보장해 준다면 충분히 지금과 같은 폐쇄와 독재를 감내할 수 있다고 믿는 다수 또한 존재하며, 가난했던 옐친 집권기를 경험한 중장년 세대들 중 상당수는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에 빠져 심지어 푸틴을 지지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푸틴 유고 시 닥칠 혼란 상황, 즉 국가 붕괴에 대한 걱정과 공포가 지금의 전쟁 상황에 대한 걱정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더 클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아직까진 급진적인 변화가 러시아 내부나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이번 전쟁으로 인해 푸틴에 대한 반감이 증폭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푸틴 체제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되는 데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동력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상황은 점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치닫고 있다. 오히려 시진핑의 중국은 더욱 더 러시아와 밀착하고, 북한의 김정은이 암암리에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소문만 횡횡할 뿐이다. 이는 마치 3차 대전의 데쟈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푸틴, 시진핑, 김정은 혹은 하메네이가 각각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천황을 대신하면서 말이다. 실제 이런 예상까지 하며 공포를 느끼는 러시아인들 또한 많다. 하지만 이런 위기와 혼란을 잠재우고 세상을 구원할 지도자나 정치인은 러시아 국내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정치적인 이익과 세속적인 계산에만 매몰된 야욕과 탐욕의 영혼들만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체 인류를 대상으로 소위 깽판을 놓고 있을 뿐이다.

바이든은 교활한 여우이다. 그가 이끄는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중국을 어르고 달래면서 확증편향에 빠진 푸틴의 러시아를 코너로 몰려 할 것이다. 핵전쟁이나 3차 대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크라이나에서 결국 푸틴이 패배하는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푸틴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애초에 어떻게든 전쟁을 막으려 애썼던 마크롱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쟁을 끝내는 순간 자신의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 되고, 이는 곧 자신의 권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며 러시아와 서구의 싸움이라는 선전 선동을 통해 내부적 결속을 다지려 한다. 같은 이유로 어떻게든 시진핑과 김정은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겠지만, 겁쟁이일지라도 시진핑은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 김정은 역시 예측 불가능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푸틴처럼 늙지는 않았다. 외로운 늑대 푸틴은 그렇게 자신과 러시아의 무덤을 파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공포와 좌절을 느낀다. 어느 곳에서도 지금보다 나은 해결책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깐 화제를 돌려보자면, 1990년대에 태어나고 자란 지금의 러시아 젊은 세대들에게 일종의 레전드와 같은 영화가 있다. 러시아의 제임스 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절한 배우 세르게이 보드로프 주연의 영화 브랏(брат)’이 바로 그것이다. 브랏은 우리 말로 하면 형제이다. 암울했던 1990년대 보리스 옐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낭만적 느와르인데, 소비에트 시절 음악들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러시아 영화 '브랏'의 한 장면
러시아 영화 '브랏'의 한 장면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 중에 힘은 진실에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브 춈 실라 브랏?(в чём сила брат? 형제여, 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실라(сила)’, 즉 힘이라는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힘을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그런 그들이 진정한 힘은 진실에 있다는 대사에 열광한다. 그렇다. 힘은 조작이나 선전 선동에 있지 않다. 푸틴의 거짓된 전쟁은 그래서 힘을 가질 수 없다. 러시아 국민들의 진정한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조작된 여론 조사나 강압적 투표를 통해 러시아 국민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틴을 부추기고 푸틴에게 전쟁의 명분이 되어주는 일부 극단적인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이 전쟁을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전 세계인의 혐오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러시아가 처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서구의 위협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1990년 대의 악몽을 겪었던 러시아인들에겐 국가와 체제 붕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 상처가 지금 푸틴의 허구적 전쟁을 지속시키는 침묵과 방관의 원인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발악을 하며 거짓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푸틴과 그의 정권은 결국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뇌와 조작, 선전과 선동이 일상적인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체제 역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허한 이상에 그치지 않고 개개인들의 혁명적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영화 대사처럼 힘은 바로 진실에 있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영화 브랏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나치 부역자였던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욕설 섞인 농담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크라이나에서 애국자로 칭송받기 때문이다. 푸틴의 전쟁 명분이기도 한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와 결부해 이 영화를 보면, 러시아가 지닌 독특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러시아인들의 정서와 경험을 조금 더 정확히 알고, 근현대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떠올리면 1990년대의 혼란했던 러시아의 현실이 현재 러시아의 가까운 미래와 중첩되는 것을 느낀다. 과연 러시아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내면에 전염병처럼 만연된 허무와 냉소를 딛고 영화 속의 정의롭고 낭만적인 주인공 다닐라처럼 여유와 유머를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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