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 김효헌 = 필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은 김정은 정권 하에 놓여있는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자가 이곳 에딘버러에 살면서 북한 사람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중동의 여러 국가들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환경 또한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 시리아에서 온 친구 삼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삼은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난 후 2013년 터키로 가서 6년 동안 너무도 험난한 고생을 하며 구걸과 노숙으로 연명하다가 2019년 9월 난민의 자격으로 영국, 에딘버러로 오게 되었다.

2013년 이후 9년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으며 만약 지금 시리아로 입국을 한다면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난민 비자가 만들어지면 그때 당당하게 고국으로 가족을 만나러 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벌써 가족을 만난 것 같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면 아직도 5년을 더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삼은 2027년에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 이다.

이제 삼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삼은 시리아의 소도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삼, 남동생, 그리고 2명의 여동생이랑 살고 있었다. 삼의 아버지는 삼촌과 함께 그 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였는데 주로 종이와 출판물과 공책 상자 등 종이와 관련된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시리아에서 3번재로 큰 공장이었다고 했다. 공장의 건물은3층으로, 1층은 공장이었고 2, 3층은 주거를 위한 집으로 지어졌으며 45가구가 살 수 있는 크기였다.

남자들은 우리나라남자들처럼 군복무를 3년간 한다. 삼도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2009년 제대를 했다. 제대후 법대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공장에서의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을 정도였고 나중에 변호사를 꿈꾸는 마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2년후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변해 버렸고 아버지의 사업도 가늠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장 군인들이 공장을 빼앗고 직원들을 죽이기 위해 공장을 포위하고 한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둘러싸고 총을 겨누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버지와 삼촌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숨막히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직원들은 공장이 일터고 삶의 장소이기 때문에 어디를 갈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틀동안 아버지와 삼촌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총성과 함께 몇 분만에 공장은 초토화되었고 5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할 수 있었지만 이후로 삼의 가족은 사업과 공장, 돈까지 모두 잃었다.

출처: 옥스팜
출처: 옥스팜

그렇게 시작된 내전으로 삼과 가족들은 매일 여기저기서 화약 냄새나는 총성을 들어야 했으며 두려움에 떨며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때 전기는 하루에 1시간만 시용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었고 시용 할 수 있는 시간은 정부에서 정해주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새벽 1시가 될 수도 있고 낮12시가 될 수도 있고 언제 가능한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허락된 이 시간에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정신없이 밥을 하거나, 샤워를 하고, 전자제품 충전을 해야 했다. 모든 사람이 주어진 한 시간 안에 해야 했고 불평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이 납치를 당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평 정도의 작은 방으로 7명이 함께 지냈다. 하루에 물 한 병과 감자 몇 개 와 사과가 전부였다. 빽빽한 방에서 차렷 자세로 서서 먹고, 자고 하면서 마치 개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납치범들이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몸값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삼은 아버지의 전화 번호를 알려 줬고 그들이 전화를 했다. 그때 납치범들이 요구한 금액은 우리 돈으로 약1억 원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감히 만질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공장과 직원들을 잃고 이제 아무것도 없는 아버지는 납치범들이 요구하는 1억원의 엄청난 금액을 듣고 담담한 어조로 아들을 포기할 테니까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렇게 10일 정도를 더 감금상태에 있을 때 샴의 아버지는 한화 약1250만원으로 협상을 하고 삼이 풀려나게 되었다. 이 돈은 시리아에서는 엄청난 금액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서리 치며 트라우마를 느낀다고 했다. 필자에게 끔찍한 과거의 경험들을 전해주기위해 지난날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삼의 가족은 삼이 더 이상 시리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리아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준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 변호사에게 700 달러를 빌려서 터키로 가기로 했다. 터키는 시리아의 이웃 국가로 많은 시리아 인들이 국경을 넘는 지역이다. 하지만 삼은 3개월 관광비자로 터키에 갔다. 도착해서 난민 신청을 했지만 터키 정부는 시리안 인들이 차고 넘친다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생면부지의 땅 터키, 아는 사람도 없고 터키말도 할 줄 모르며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매일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마침 터키에 도착했을 때가 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1시간에 물병 하나가 필요할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75달러, 한화 약 9만원 정도였다. 그 돈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다가 결국에는 돈이 바닥이 났고 그때부터 그는 거리를 방황하며 전철역에서도 자고 매일 밤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지냈다. 어떤 날은 11시간을 무작정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방황하며 막막한 시간을 보냈다.

정말 기적적으로 시리아 말을 하는 엄마와 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삼은 망설임없이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는데 천운으로 마침 삼과 같은 고향일 뿐 아니라 삼의 친구를 이 엄마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삼의 아버지가 공장을 하셔서 웬만하면 다 알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삼은 타국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서 그동안의 고향 이야기며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삼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여자는 삼의 구직운동에 발벗고 나서 주었다. 삼과 같이 구직이 붙어있는 가게는 일일이 찾아가서 터키말로 삼의 좋은 점과 믿을 만한 신분이라며 자신이 신분을 보장할 수 있으니 꼭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구직을 도왔다.

그렇게 여러 날 구직을 하러 다녔지만 정말 쉽지 않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한 옷 가게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그 에게 일을 하게 하였다. 할아버지가 삼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끌어안으면서 여기에서 일하라고 했다. 그 가게는 여성 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옷 가게 로 겉옷부터 속옷까지 전부를 팔았다.

삼은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주7일, 12시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일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는 쉬는 시간에 틈틈이 터키언어를 스스로 공부했다. 처음에는 가게에서 생활했지만 차츰 상황이 좋아져서 한집에 5명이 사는 집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하루의 피로를 포커를 치며 보냈지만 삼은 그 틈바구니 안에서 유투브를 보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체력관리도 해서 1년만에 터키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틈틈이 관리한 체력으로 나중에는 남성복 모델까지 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살았다. 모델을 할 때 한 번에 수 천벌 식 팔려 나갔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시리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터키에서의 불확실한 미래는 그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터키에 산지 5년이 되었을 때 터키 정부가 발표하기를 ‘시리아 인들은 시리아 내전이 끝났으므로 더 이상 터키에 머무를 수 없다’며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 졌다. 삼은 터키에 온 후에 제삼 국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터키에는 시리아와 여러 중동국가에서 탈출해서 터키에 왔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노속인들이 가득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면서 터키에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영국에 난민 신청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터키에서 시리아 인들은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져서 더욱 다급한 상황이었다. 3년전부터 영국, 프랑스, 독일등으로 계속 난민 신청을 하는 과정에 정말 다행히 영국에서 난민 심사를 하기위해 심사위원이 터키를 방문했다. 심사위원은 삼이 그동안 살아온 역경의 과정과 준비한 모든 서류들이 난민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결론이 났고 영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삼은 2019년 9월에 코로나로 녹다운이 한창이었을 때 에딘버러에 오게 되었다.

코로나상황에서 출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벽을 보고 말을 해야 했지만 영국은 자신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동안의 어려운 삶이 이제는 희망적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은행에 간다고 했다. 왜 가는지 물어보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생활비로 200파운드를 보낸다고 했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힘겹게 번 돈을 보내는 것을 보고 삼을 그리워하는 부모님의 심정과 부모님을 사랑하는 삼이 더 없이 멋진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삼을 만나기전에 시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 지, 왜 내전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얼마나 많은 난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했다.

삼을 만나고 나서야 시리아라는 나라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되었다. 시리아는 내전으로560만여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난민으로 전락했고, 620만 명은 실향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전이 발생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를 보면서 정치적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한번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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