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해회장

[뉴스인] 박준식 기자  = “생존은 강인함이 아니라 적응입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히든 챔피언을 꿈꾸는 (주)씨아이씨티 이승해 회장의 경영철학은 변화하는 시류에 뒤처지지 않게 ‘적응’하는데 있었다.

융복합의 산업시대에 갖추어야 할 기술혁신과 상생을 위해 이 회장은 변화하는 경제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총력을 다해왔다. 나아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객체가 아닌 주체, 팔로워가 아닌 리더가 되기까지 쉬지 않고 도전의 도전을 실천해왔다. 오늘을 만들어낸 ㈜씨아이씨티는 한마디로 변화를 위한 ‘불굴의 의지’로 말할 수 있다.

이승해 회장 삶 자체가 바로 적응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씨아이씨티의 이승해 회장은 1956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74년도에 처음으로 특수인쇄업계에 입문했다. 원래는 꿈이 판검사였으나, 가정환경으로 인해, 진학을 하지 못하고 특수인쇄공장에서 일은 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되었다.

당시에는 한일 합작으로 특수인쇄를 하는 공장이 2,3개사 정도가 있었는데, 그런 공장들 중 한곳에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을 하였다. 당시 업무 시스템은 3개월 마다 직무능력을 평가하는데, 직무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획득하면, 일급이 오르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일급 460원을 받았는데, 첫 직무능력 평가 후에는 700원으로 올랐고 재미가 생기면서,  특수인쇄공정을 계속 연구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입사 6개월 때는 일급이 2,000원으로 상승을 했는데, 당시 업계 최고 엔지니어의 일급이 2,500원인걸 감안하면, 젊은 나이에 상당한 급여를 받았다고 했다.

이런 추억이 있어, 연구소의 직원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에게 연구 개발하는 것에 대한 지원을 해주고 있으며, 스스로 갈고 닦는 노력의 중요성을 정말 강조한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공장장이 된 이후 다른 회사에도 스카웃이 되기도 하고, 군대복무를 마치고 보니, 24세에 창업을 일찍 시작 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굴기의 사업을 시작 했으며, 사업이 승승장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업종의 변화에 따른 사업군 부도에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당시의 업종의 변화를 인식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부도날 당시에는 삐삐, 시티폰, 카오디오 등에 주력으로 납품했는데 세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부도가 났었 것. 이러한 값진 경험의 학습효과로 차츰 미래 지향적인 사업군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회장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실험과 연구했던 것”이라며,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도전을 계속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업실패를 미래의 성장분으로 삼아 (주)씨아이씨티를 설립 했고 지금도 특수인쇄산업에 대한 넓은 시야로 많은 산업 분야에 적용을 연구 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의 시대 산업은 손안에 거머쥔 전화기로 인해 완전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있다. 산업 간 경계의 선상에서 산업혁명을 이끄는 이 스마트폰 혁명은 전세계 산업의 중심에 서 있다.

신기술 개발로 스마트폰 시장 내의 가격경쟁력 우위를 확보한 (주)씨아이씨티는 빠르게 변화하는 초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탈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크리에이터 이승해를 선두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 최고를 넘어 글로벌 시장변화의 흐름을 선도하는 기업가,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주체로 우뚝 서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게 업계의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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