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의 경마

2009-04-03     박생규
【서울=뉴시스헬스】박생규 기자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신설동 경마장에서는 일요경마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시행했다.

특히 이 날은 신익희 국회의장 상전(賞典)경주가 있어서 많은 입장객이 몰려들었다.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경마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었다.

첫 경주는 11시에 시작됐고 경마팬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말들의 질주에 환호했다. 불안한 조짐이 보인 것은 4경주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체불명의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경마장 상공에 나타나 전단을 살포하고 사라졌다.

전단을 주워 읽어본 사람들은 그제야 비행기가 북한군의 정찰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한의 대남선전 전단이었던 것이다.

신설동 경마장은 다소 술렁거렸으나 경마는 계속됐다. 제7경주 신익희 국회의장 상전경주도 무사히 치러졌다. 오후 5시께는 경마장에도 북한군의 남침사실이 알려졌다.

확성기를 단 군용 지프가 휴가 중인 장병들의 즉시 귀대를 종용하고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을 했다. 그 와중에도 경마는 계속 진행되어 마지막 12경주까지 모두 마쳤다.

한편 경마가 끝날 무렵 조교사와 기수들은 대한청년단 본부에 집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는 대한청년단 동대문구단 본부가 있었으며, 젊은 조교사와 기수들은 대부분 청년단원이었다.

이날 일찍 경주를 마치고 청년단 사무실에 먼저 모였던 조교사와 기수들은 그 길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났다. 반면 사무실에 늦게 도착했던 사람들은 징집을 면해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1928년 9월 20일 조선경마구락부의 경성경마장으로 개장식을 가진 이래 22년간 경마를 시행했던 신설동 경마장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 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신설동 경마장에 탱크와 차량 등 군 장비를 은닉했는데, 이 때문에 신설동 경마장은 미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다.

신설동 경마장에 있던 경주마 200여두도 인민군에게 끌려가 군수물자를 수송하다가 한미 연합군의 포탄 세례를 받고 대부분 죽고 말았다.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연합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한 후 마사회 임직원들이 신설동 경마장을 찾았을 때는 말들이 전부 사라지고 금고는 텅 비고 건물은 참혹하게 부서져 그야말로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사회는 10월30일 이사회를 열고 경마를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10월 중순께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어 1.4 후퇴를 맞았다. 경마장에 잔류했던 임직원들은 또 다시 피난길에 오르고, 경마는 긴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자료=한국마사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