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난동·협박·살인…'조각난 명의의 꿈'
국내 의사 9만1393명‥"의사 겨냥 폭언ㆍ폭행 빈발"
2008-11-09 손대선
수년 사이 의사들을 겨냥한 폭언과 폭행이 빈발해진다다가 살인사건까지 걷잡을 수 없이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가족부 면허관리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의사는 9만1393명.
그러나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늘어나고 있다.
화이자제약이 최근 북미·유럽·아시아 등 13개국 의사 1741명에게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의사들의 79%가 전체 의료업의 방향이 부정적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는 '긍정적'이라는 답변이 평균 56%에 달한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 악화'(28%)를 회의적인 답변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연이은 환자들과의 마찰로 인해 의사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인술을 베풀어 고귀한 인명을 구하겠다는 '명의(名醫)의 꿈'은 점차 조각난 희망이 되어가고 있다.
◇폭언·폭행은 다반사…살인까지 서슴지 않아
이달 1일 강원도 속초시 한 모텔 옆 주차장에서 의원을 경영하는 박모씨가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앞서 6월에는 대전의 한 대학병원 의사 김모씨가 치료결과에 앙심을 품은 40대 남자로부터 살해당했다.
올해 4월 경남 거제시의 한 병원에서 40대 남자가 병실 유리창을 깨고 흉기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남자는 경찰이 쏜 총에 맞고서야 비로소 난동을 멈췄다.
올 들어 언론을 통해 크게 부각된 의사대상 범죄는 10여건.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범죄는 이보다 수십 배 이상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같은 현상은 병원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우려, 외부에 사건자체를 알리길 피하는 병원 측의 소극적인 태도가 한몫 한다.
대한의사협회는 연간 발생하는 의사대상 범죄를 1000~5000건으로 추산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들은 폭언과 가벼운 폭행은 응급실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사'라고 입을 모은다. 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멱살잡이는 '애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경기도에 있는 한 병원의 홍보실장 노모씨는 "새벽 무렵, 술 취한 환자나 그 가족들이 주로 행패를 부린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최근 개원한 의사 김모씨는 "종종 사람의 생명이 달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런 일을 당하기 때문에 병원 측이나 의사들은 속 앓이는 하지만 몸만 크게 다치지 않으면 대부분 그대로 넘어 간다"고 말했다.
◇잘못된 의학지식 폐해 VS 의사들의 부도덕
병원안팎의 시선은 일단 의료행위에 대한 일반인들의 불신감이 커지면서 이 같은 범죄가 빈발한다는데 모아진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을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의사들은 불분명한 입소문을 통해 정당한 진료까지 불신을 사고 있는 세태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어디 병원 의사는 빨리 완치시키는데 여기는 왜 이러느냐?"는 항의가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잘못된 의학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환자들이 '준의사' 행세를 하는 것도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 쪽에서는 그동안 '그들만의 리그'처럼 일반인에 은폐되었던 의학지식들이 일반화되면서 그동안 팽배했던 의료행위에 대한 불신감이 일시에 터져 나온 게 이 같은 불행한 사태의 빌미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7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4월10일~6월10일)까지 부당청구가 의심되는 병원 등 478개 건보 요양기관 중 54.8%인 262개 기관이 건보급여를 부당청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당청구가 곧바로 의사들의 부당의료행위와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들이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개연성은 충분한 셈이어서 일반인의 의료불신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료권 보호 위한 제도적 장치 시급
외부로부터 진료권이 위협받는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이기도 하다.
지난달 17일 서울서 열린 세계의사회 서울총회에서 채택된 '서울선언'은 진료권을 위협받는 전세계 의사들의 고민이 담겨있다.
당시 총회에 참가한 세계의사회 욘 스내달 회장 등 86개국 400여명의 의사들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 정부 등 외부단체나 개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선언이 국내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사들 자신들조차 장담 못하고 있다.
현재 의료법은 의료인에 대한 폭행 시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용 시설을 파괴하거나 그 밖의 기물을 손상하는 행위 또는 의료기관을 점거해 진료를 방해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의사협회 김주경 대변인은 "경찰은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범죄에 대해서는 '합의'를 유도하고 법원은 이 같은 범죄에 대해 형량을 낮게 매기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가법도 고려할 만한 상황이라는데….
의사들은 의사대상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위해서라도 사법당국이 엄중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한다는 입장이다.
의사협회는 대전 모 대학병원 의사 피살사건 때와 이달들어 발생한 피습사건에 즈음해 잇따라 성명을 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제정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협회 김주경 대변인은 "택시나 운송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특정범죄 가중처벌을 받지 않는가"라며 "피해는 단지 위해를 당한 의사들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은 의사들의 진료를 받는 환자들에게도 2차피해가 간다"고 말해 특가법 제정을 정당화했다.
의사협회는 이와 동시에 진료행위에 대한 불신감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포털사이트와 손잡고 일반인에게 올바른 의학상식을 알리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김주경 대변인은 "환자들이 우려하는 의료사고가 날 경우, 예전과는 달리 법정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많다"며 정당한 항의절차가 정착되어야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시민단체들은 의사들의 이 같은 주장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의료체계 전반에 대한 투명성이 제고되어야만 현재와 같은 진료불신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보건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C씨는 "의료사고를 법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법원이 과연 환자의 이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있는지는 미지수"라며 "의사들이 국민들에게 먼저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는 납득할만한 조치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