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비극의 도시 폼페이에서 마주한 뜻밖의 평온”

베수비오 화산의 흔적 위에 선명히 남은 로마인의 삶과 나폴리의 역사적 시간 여행

2025-11-21     정영훈 여행전문 칼럼니스트
베수비오산 전경.

[뉴스인] 정영훈 여행전문 칼럼니스트 = 세계3대 미항 중의 하나라는 나폴리를 찾았다. 그런데 오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 상으로 비가 온다고 되어있있다. 그것도 많이 !

그런데 이번에도 나폴리항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날이 개이기 시작하였다.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이동하는 중에 베수비오 화산의 모습도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정상부근에 살짝 걸친 구름은 풍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베수비오산 전경.
폼페이에서 바라본 베수비오산 전경.

드디어 폼페이에 도착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자연재해의 현장으로 유명한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2,000년전 비극의 현장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모든 것이 평화로이 보였다. 비가 온뒤의 더없이 맑고 투명한 공기와 풍경은 최악의 재해 현장이 아니라 가장 평화로운 공간으로 변신한 듯한 착각을 하게 하였다.

폼페이 유적지 입구(옛 항구 방향).
폼페이 유적지 입구(옛 항구 방향).

나폴리와 인근 폼페이는 BC3세기경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살기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후 BC1세기 삼니움 전쟁을 통해 로마가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완전히 평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인기 거주지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폼페이 기타 풍경.
폼페이 기타 풍경.
폼페이 기타 풍경.
폼페이 기타 풍경.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이미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으며 당시 인구가 25,000명을 넘을 만큼 대도시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올리브와 포도가 잘 자라는 비옥한 토지와 인근 강을 통한 풍부한 물 공급이 가능했고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최고의 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이에따라 로마의 왕족과 귀족들은 물론 부유층의 별장과 거주지로 크게 부각되었다고 한다.

물고기 모양의 폼페이 유적지.

이런 폼페이에 비극의 그림자 징후가 처음 찾아온 것은 AD 62년경이라고 한다.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큰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베수비오산이 대폭발을 한 것이 서기79년이니 재난발생 17년전 이다. 이후 잦은 전조 증상이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곳 폼페이에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대부호들과 관리들이었다고 한다. 모든 재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부호들이 역설적으로 많이 희생을 당한 이유이다.

폼페이 대로(마차길).
폼페이 대로(마차길).
유흥가를 가르키는 표시.
유흥가를 가르키는 표시.

서기 79년8월 베수비오산의 대폭발과 더불어 바람의 방향이 나폴리와 폼페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한다. 대폭발과 더불어 바람이 폼페이쪽으로 불면서 폼페이에는 재앙이 반대편인 나폴리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상반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폼페이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파괴되였다. 찰라의 순간에 고온의 열기와 화산재가 폼페이를 뒤덮으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사라졌다. 발굴된 화석을 통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처절한 최후의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5~10m 두께의 화산재로 덮히면서 이후 폼페이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폼페이 목욕탕 유적.
폼페이 목욕탕 유적.
폼페이 목욕탕 유적.

모두에게 잊혀진 폼페이가 처음 발견된 것은 서기1,500년경 이라고 한다. 당시 수로공사를 하기위해 땅을 파헤치다가 유적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의미를 몰라 다시 잊혀졌다고 한다.

폼페이 빵가게 유적.

이후 서기 1,700년경 프랑스가 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 폼페이 유적의 가치를 알고 일부 유물을 발굴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고 한다.

폼페이 도로에 설치된 급수대.

이탈리아에서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된 1861년 이후에야 비로서 고대 로마 제국의 유적 유물의 발굴과 보전이 시작되었다. 폼페이 유적은 2025년 현재 아직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폼페이 골목길(낙서금지 표시).

오늘 우리가 둘러본 폼페이의 유적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고대도시 폼페이의 모습은 물고기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항구가 폼페이에 있었다. 항구에서 거주지로 연결되는 대로에는 마차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돌길에 그대로 남아있다. 도로의 중간 중간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도 설치되어 있다. 비극 시인의 집이라는 당시 부호의 유적 입구에는 모자이크로 개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써있는 문구가 아주 재미있다. "개 조심" 그리고 골목길 곳곳에 "낙서금지"라고 써 있기도 하다. 지금이나 2,000년전이나 사람사는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폼페이 부호의 집 (비극 시인의 집: 개조심 모자이크).
폼페이 부호의 집 (비극 시인의 집: 개조심 모자이크).

현재 발굴된 폼페이 유적지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과 대극장, 목욕탕, 빵가게, 상점, 유흥가, 법정 등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맑고 청명한 날씨 덕에 저 멀리 베수비오산이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 만큼은 파란 하늘과 붉은 벽돌 사이의 평화의 메신저처럼 보인다.

폼페이 상점 유적에 전시된 희생자 석고상.
폼페이 상점 유적에 전시된 희생자 석고상.
폼페이 상점 유적에 전시된 희생자 석고상.

점심식사로 나폴리 화덕피자와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다시 출발장소였던 나폴리로 돌아갔다. 서로마제국의 멸망(AD476년)이후 중세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본토는 도시국가 형태로 이어져 왔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국, 밀라노 공국 등 대부분이 공화국 또는 공국의 형태를 이어온 것과 달리 나폴리는 나폴리 왕국이라는 왕정체제를 유지해 왔다. 나폴리에서 가장 큰 산 카를로 광장에는 당시 나폴리 왕국의 왕궁이 남아 있다.

폼페이 법원 유적.

 

나폴리 산 카를로 광장.
나폴리 왕궁.
나폴리 움베르또 갤러리.
나폴리 움베르또 갤러리.
나폴리 화덕 피자.
나폴리 화덕 피자.

조금더 안쪽으로 걸어가면 밀라노의 임페리얼 갤러리와 비슷한 움베르또 갤러리가 있다. 쇼핑 천국이다. 마침 시기적으로 블랙 프라이데이가 임박해 있어 상점마다 파격적 할인 판매 문구가 도배를 하고 있다. 수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와인가게를 찾았다. 나이 많으신 가게 주인의 강추로 시칠리아 와인 한병을 샀다. 그런데 와인은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이 없었다. 아쉽지만 주인 할아버지가 "너 오늘 엄청 좋은 와인을 싸게 샀다" 라는 말을 믿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한다~

나폴리에서 구입한 시칠리아 와인.
나폴리에서 구입한 시칠리아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