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위의 고래, 세계를 품다"
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와 한국 문화의 원형적 힘
[뉴스인] 박병규 논설위원 = 2025년,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깊은 층위에서 문명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것이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인정받는 순간을 맞이했다. 울산 울주 반구천 계곡에 새겨진 수많은 선사시대 암각화들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떼와 사냥 장면들—6천 년의 시간 동안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든 이 거대한 이야기 그림책이 드디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인류가 문자를 갖기 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소통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반구천의 암각화는 고요하지만 확고한 대답을 들려준다. 돌 위에 새겨진 그림들은 단순한 사냥 장면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자 믿음의 체계였고, 공동체가 공유한 우주의 질서였다. 고래를 좇던 이들이 남긴 선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있고, 열망이 있고, 무엇보다 '기록하고자 하는 본능'이 서려 있다.
이는 곧 한반도 사람들의 정체성과 정신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자 이전에도 사람들은 예술을 남겼고, 그것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문화적 기질은 한반도 역사 내내 이어져왔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신라의 금관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불화에서 조선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은 늘 예술과 이야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것을 'K컬처'라 부른다. 한국 드라마, 음악, 영화, 게임, 웹툰은 '그림으로 말하던 선사시대의 언어'를 21세기의 감각으로 되살려낸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세계 무대를 누비며 전한 메시지와 6천 년 전 울산의 누군가가 바위에 새긴 고래는 어쩌면 '공감과 기억을 나누고 싶은 동일한 열망'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단지 문화재 한 점이 인정받은 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는 한국인의 창조성과 표현 욕구, 기록과 소통의 본능이 시간과 문명의 경계를 넘어 인류 모두의 유산으로 이어졌다는 선언이다. 또한 반구천의 암각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자산이다. 그 감동은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어 현대의 예술과 산업, 관광과 교육, 지역과 공동체를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는 미래의 문화자원이자 이야기 원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반구천의 돌에 새겨진 흔적을 단지 박물관에 가두어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의 물줄기로 다시 흐르게 해야 한다. 지역 사회와 함께 보존하고, 창작자들과 함께 재해석하며, 세계 시민들과 함께 감동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계유산은 '기억의 공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반구천의 암각화는 그 가장 오래된 모범이자 오늘날 K컬처의 원형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 그 돌 위의 고래들이 다시 우리 앞에서 헤엄친다. 인류가 만든 예술의 첫 문장 중 하나가 바로 이 땅,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우리는 그 이야기의 다음 장을 우리 손으로 써 내려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