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원리, 한국 사회 갈등 해소의 비밀을 품었을까?

2025-06-30     박병규 논설위원

[뉴스인] 박병규 논설위원 = 한국 사회는 참 다이내믹하다. 가끔은 격렬한 논쟁과 겉으로 드러나는 심한 갈등 때문에 "다혈질의 민족"이라는 오해도 받곤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국 사회는 이런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화합하고, 그걸 발판 삼아 엄청난 성장의 동력을 찾아내는 저력을 끊임없이 발휘해왔다. 짧은 시간 안에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한국 사회의 독특한 회복탄력성을 증명한다.

박병규 논설위원. (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집행위원장, 전 중앙일보 기자)

 

이런 한국 사회의 특별한 풍경이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 바로 한글의 원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나는 한글이 가진 조합과 조화의 원리, 섬세한 감정 표현 능력, 그리고 동양 철학적 배경이 한국인들의 생각과 감정 체계에 영향을 미쳐, 궁극적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기질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고 가설을 세워본다.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한글의 '조합' 원리, 그리고 뇌의 작동 방식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라는 개별적인 소리 단위가 합쳐져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의미를 만든다. 'ㄱ'과 'ㅏ'가 만나 '가'가 되는 것처럼, 개별적인 요소들이 모여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조합의 원리가 한글의 핵심이다.

이런 언어적 경험은 한국인들의 생각하는 방식에 깊이 박힐 수 있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뇌는 정보를 처리할 때 단순히 개별적인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여러 정보를 통합하고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글의 조합 원리는 뇌가 이처럼 부분에서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훈련시킨다. 복잡한 사회 갈등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문제의 개별적인 부분들을 또렷이 인식하면서도,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큰 틀 안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경향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특정 문제에 몰입해 갈등을 겪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따로 또 같이' 함께 가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건 극단적인 분열보다는 통합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섬세한 감정 표현, 뇌의 공감 회로를 자극하다

한글은 그 어떤 언어보다도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정교하게 담아낼 수 있다. 점 하나로 '님'과 '남'이 되어 그리움과 후회 같은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수많은 의성어와 의태어로 세상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이런 언어적 특징은 한국인의 감정 체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신경과학자들은 언어가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한글처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누는 데 익숙한 한국인들은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잘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능력이 발달할 수 있다. 이는 ‘거울 뉴런’ 시스템이나 정서적 공감을 담당하는 뇌 영역의 활성화와도 연관될 수 있다. 갈등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뿐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려는 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화해의 여지를 찾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외국어로는 번역이 어려운 ‘정(情)’과 같은 독특한 우리말의 개념처럼, 감정적 유대감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한글의 섬세함은 갈등 후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한다.

◇'변화와 조화'의 철학, 뇌의 유연성을 강화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 있듯이 한글을 만들 때 음양오행이라는 옛 동양 철학이 깊이 녹아있다는 건, 세상의 모든 것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돕고 끊임없이 변하며 조화를 이루려 한다는 거다. 이런 철학적 관점이 한국인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줬을지 모른다.

뇌의 유연성(Brain Plasticity) 연구는 경험과 학습이 뇌 구조와 기능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고방식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뇌가 고정된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문제 상황에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인지적 유연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 갈등을 겪을 때 한국인들은 그걸 영원한 대립으로 보기보다, ‘더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한 일시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음양이 순환하듯이, 격렬한 갈등도 결국에는 새로운 균형과 조화를 찾아 돌아올 거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건 극단적인 분열로 치닫기보다, 타협과 포용을 통해 다시 전체적인 안정을 찾으려는 강한 사회적 회복탄력성의 문화적 바탕이 된다.

◇한글이 품은 화합의 DNA

물론 한국 사회의 복잡한 갈등 양상과 이를 극복하는 힘을 한 가지 요소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인 한글이 지닌 과학적인 합리성과 철학적인 깊이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 나아가 사회 전체의 행동 방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다는 가설은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 최신 뇌과학 연구는 언어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우리의 뇌 회로를 형성하고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글은 단지 소리를 적는 도구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 그리고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겉으로는 갈등이 심해 보여도 결국 화합으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의 저력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쓰고 배우는 한글 속에 그 비밀의 DNA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