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볼보이·볼걸의 세계
김효헌의 스코틀랜드이야기
[뉴스인] 김효헌 =매년 여름, 영국 윔블던의 푸른 잔디 위에서는 세계 최고의 테니스 대회가 열린다. 올해 윔블던 챔피언십은 제138회 대회로, 2025년 6월 30일(월)부터 7월 13일(일)까지 14일간 열린다. 이 대회 특징은 유일하게 잔디 코트에서 열리는 그랜드슬램 대회다.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여 선수 복장은 전신 흰색 착용이 원칙이다. 또 딸기와 크림을 먹으며 경기를 관람하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윔블던 테니스 경기는 수많은 관중이 숨죽이며 경기를 바라보고, 선수들은 한 포인트, 한 포인트에 모든 것을 건다. 그리고 그 무대 뒤에서, 한 치의 실수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기의 중심은 아니지만,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바로 윔블던의 볼보이·볼걸(BBG)이다.
이들은 조용히 움직인다. 빠르지만 방해되지 않게, 정확하지만 티 나지 않게. 공이 라인을 벗어나면 재빠르게 처리하고, 선수가 수건을 찾기도 전에 이미 손에 쥐어준다.
그 모습은 마치 경기장을 누비는 ‘그림자’ 같지만, 그 속엔 고도의 집중력과 철저한 훈련이 깃들어 있다.
147년 전, 그 첫 시작
윔블던은 1877년, 단 한 종목의 남자 단식 경기로 조용히 시작되었다. 초기의 윔블던은 지금처럼 거대한 대회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경기 옆에서 공을 주워주던 소년들이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이 역할은 지역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좀 더 조직적인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체계적인 훈련과 선발 절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는 여학생도 함께 선발되면서, 지금의 볼보이·볼걸 체제가 완성되었다. 윔블던의 잔디 위를 묵묵히 지켜온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누구보다도 진중한 움직임으로 경기를 완성하고 있다.
1,600명 중 단 276명, 정예만이 살아남는다
2025년, 제138회 윔블던 챔피언십에는 약 1,600명의 십대 학생들이 BBG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중 최종적으로 선발된 인원은 단 276명뿐이다. 대부분이 영국 내 중학교 9~10학년 학생들로, 이들은 몇 개월에 걸쳐 테니스 규칙 시험을 치르고, 수천 번의 공 굴리기 연습, 민첩성 평가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윔블던에 설 수 있다.
선발된 후에도 훈련은 계속된다. 매주 금요일엔 AELTC 투어, 토요일엔 센터 코트 실전 훈련, 일요일엔 반드시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경기 하루 전, 몸과 마음 모두가 정확함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경기장을 누비는 ‘조용한 전문가’
윔블던 BBG는 여섯 명이 한 조로 구성되어, 한 시간씩 교대로 경기장에 선다. 공을 빠르게 전달하고, 수건과 음료를 선수에게 건네주는 모든 과정이 정해진 루틴에 따라 이뤄진다.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경기 흐름 전체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BBG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순한 수고비가 아니다. 식사와 교통비, 그리고 윔블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랄프 로렌 유니폼. 하지만 무엇보다 큰 보상은 바로 윔블던의 일부로 함께했다는 자부심이다.
침묵 속에 움직이는 훈련
윔블던 BBG의 훈련은 군사훈련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엄격하다. 모든 지원자는 번호표를 달고 훈련에 임하며, 말 한 마디 없이 침묵 속에서 지정된 동작을 반복한다. 2017년 BBG였던 케이티 스카이름은 훈련을 이렇게 회상한다.
“항상 긴장한 상태였어요. 공을 잘못 굴릴까 봐, 넘어질까 봐, 선수에게 실수할까 봐…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어요.”
아침 7시 30분이면 줄을 맞춰 대기하고, 쉬는 시간에도 자발적으로 공 굴리기 연습을 반복한다. 어느 학교에선 합격자와 탈락자의 이름을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나누어 공지할 만큼, 그 경쟁은 매서운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경험
과거 BBG였던 이들은 이 경험을 흔히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 말한다.
1993년, 슈테피 그라프의 우승식에서 꽃을 전달했던 크리스티나 산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테니스는 잘 몰랐어요. 하지만 친구들과 윔블던 구내식당에서 마스바를 먹고, 저녁엔 맥도날드에 갔던 기억이 가장 남아요.” BBG는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그건 한 사람의 성장과 기억, 그리고 전통에 참여한 순간이다. 그리고 매년, 일부 BBG는 다시 지원해 ‘리콜(Recall)’로 돌아온다. 가끔은 프로 선수로부터 라켓을 선물받고, 코트 위에서 직접 공을 받아보는 이벤트도 주어진다.
윔블던의 무대 뒤, 가장 조용한 전통
경기 후 BBG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웃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나요?”
BBG 총괄 디렉터 사라 골드슨은 그 질문에 미소를 머금고 답한다. “그들은 웃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BBG는 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포츠의 흐름을 연결하고 완성하는 숨은 주역이다. 그 조용한 움직임 속엔 경기장 전체가 흐르고, 스포츠의 정신이 살아 숨 쉰다. 윔블던의 잔디 위를 묵묵히 걸어온 이들. 그들은 볼보이·볼걸이 아니라, 윔블던이 지켜온 ‘가장 조용한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