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브릿카드(BritCard), 정체성과 통제
김효헌의 스코틀랜드이야기
[뉴스인] 김효헌 =“신분증을 보여 주세요.”
이 단어는 한때 억압의 상징이었다. 슈타지(동독 비밀경찰)나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요원, 그러나 이제 영국 사회는 그 말을 다시 꺼내고 있다 — 이번에는 스마트폰 안에서, 디지털 코드로. 영국이 디지털 ID 카드, 일명 ‘브릿카드(BritCard)’ 도입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 갈림길에 섰다. 한편에서는 불법 이민과 복지 부정 수급을 막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감시 시스템으로 보는 시선이 공존한다.
보수와 진보 모두, 이제는 이민 문제에서 ‘통제’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영국은 유럽에서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일한 ‘신분증 없는 국가’이며, 이는 곧 불법 체류자들이 불법적으로 일하고 주거하는 데 취약한 환경으로 인식된다.
노동당의 싱크탱크인 Labour Together가 제안한 디지털 신분증은, 이러한 허점을 메우기 위한 ‘디지털 국경선’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이다. 노동당의 젊은 의원들은 이 제도가 개혁당(Reform UK)의 급부상에 맞서는 현실적인 대응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국경을 지킨다”는 명분은, 모든 정당의 유권자에게 통한다. 이는 정체성과 소속의 감각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브릿카드는 단순히 ‘불법 이민자 색출 도구’로 끝나지 않는다.
정부 서비스 접근, 복지 신청, 고용·임대 계약, 운전면허, NHS 이용까지 —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디지털 통합 플랫폼이 될 수 있다.
현재 gov.uk는 191개의 계정 생성 방식과 44개의 로그인 체계를 갖고 있으며, 그 복잡성은 행정의 효율성과 시민 접근성을 크게 저해한다. 브릿카드는 이를 해결하는 ‘디지털 게이트웨이’로 제안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이 단지 효율성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권리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누구에게나 보장하자는 제안이라는 점이다. 특히 윈드러시 세대와 같은 과거의 행정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증명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롭다는 논리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노동당 내부에서조차 디지털 ID 도입에 민감한 반응이 존재한다. 전임 블레어 정부 시절 의무 신분증 도입 시도는 자유 침해 논란 속에 실패했고, 지금도 프라이버시·행정 오류·차별적 접근 위험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다.
특히 정부의 신뢰도가 낮을수록, 기술이 의도한 정의 구현은 쉽게 억압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잘못된 알고리즘, 데이터 오류, 또는 고의적 오용은 합법적 시민권자의 일자리·복지·주거 권한 박탈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브릿카드를 둘러싼 ‘시험적 풍향계(kite-flying)’의 시기다. 노동당과 총리는 이 구상을 공식 채택하지 않았지만, 여론과 언론을 통해 반응을 살피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발적 등록제로 시작해, 사실상의 의무제로 전환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여론은 긍정적이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80%가 디지털 근로 자격 확인 시스템에 찬성, 약 30%는 불법 이민 억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과거보다 높아졌고, 공정한 경쟁 환경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디지털 정체성의 시대, 영국은 어디로 가는가
브릿카드는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영국 민주주의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선언이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조건에서 사회 구성원이 되며, 권리와 책임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 이 모든 질문은 이제 디지털 신분증이라는 하나의 코드로 압축되고 있다.
이 제도가 감시와 통제를 넘어, ‘모든 이의 권리를 증명하고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다시 한번, 과도한 통제와 행정 실패가 시민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까?
지금, 영국은 이 질문에 답을 내릴 중요한 순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