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위의 중세, 맥주 향 속을 걷다–브뤼헤에서 보낸 하루

2025-04-17     정영훈 여행전문 칼럼니스트

[뉴스인] 정영훈 여행전문 칼럼니스트 = 밤사이 차가운 북해를 건너 벨기에 제브뤼헤 항에 도착했다.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인 벨기에는 ‘플란다스의 개’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EU 본부, NATO 본부,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자리한 유럽의 심장부다. 초콜릿과 맥주의 천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브뤼헤(Brugge).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유럽에서는 ‘북서유럽의 베니스’로 불리는 아름다운 운하 도시다. 중세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의 역사 속에서도 놀라운 행운처럼 살아남은 도시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화마조차 이 도시는 피해갔다고 하니, 그 자체로 기적이라 할 만하다.

브뤼헤는 도시 전체가 운하를 따라 형성되어 있어 어디를 가든 수로가 시야를 가로지른다. 그러나 이곳이 다른 유럽의 운하 도시와 다른 점은, 고풍스러운 성당과 수도원, 길드 하우스들이 운하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곳곳에 꾸며진 꽃밭과 공원은 고요함을 더하며, 백조와 다양한 새들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이 도시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유람선을 타고 수로를 따라 이동할 수도 있고, 마차를 타거나 도보로 골목골목을 누빌 수도 있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브뤼헤를 느껴볼 수 있다.

도시를 걷다 보면 역사의 숨결이 담긴 건물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성모자상'이 있는 노트르담 드 브뤼헤 성당, 2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님의 피를 모신 성혈 성당, 플랑드르의 명성을 보여주는 벨포트 종탑, 시청사까지 하나하나가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단연코 벨기에 맥주였다. 수제 맥주와 수도원 맥주의 본고장답게, 현지 맥주샵은 셀 수 없이 다양한 맥주로 가득했다. 현지 가이드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Chimay’ 수도원 맥주는 감탄을 자아냈다. 깊고 진한 향,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 그리고 은은한 여운까지. 이 맛, 바로 벨기에였다.

맥주샵의 진열대 위에는 맥주에 대한 명언들이 걸려 있었다. 기원전 428년 플라톤은 “맥주를 만든 사람은 현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맥주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라고 남겼다. 1987년, 애니메이션 ‘심슨’의 호머 심슨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술(맥주).”

오늘 하루는 참 행복했다. 800년 역사의 향기를 눈에 담고, 백조의 속삭임과 꽃 향기를 귀로 듣고, 깊은 맥주의 풍미를 혀로 느꼈다. 눈과 귀와 입이 모두 즐거웠던 이 하루. 이보다 완벽한 삼위일체의 행복이 또 있을까?

혹시 진짜 ‘행복한 하루’를 꿈꾸고 있다면, 브뤼헤를 꼭 한 번 찾아보길 바란다. 분명히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정영훈 여행전문 칼럼니스트프로필

한화경제연구원 이코노미스트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상무)
한화투자증권 법인금융본부장(상무)
현 (주)크루즈나라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