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형 위원 '경마, 그 시작을 이야기하다'

2009-07-23     박생규
▲ 국산발주기 시연회 설명하는 고진형 부장. <사진=한국마사회 제공> 박생규기자 skpq@newsin.co.kr
【서울=뉴시스헬스】박생규 기자 = 주말경마 준비가 한창인 지난 17일 서울경마공원. 주로정지 트랙터의 굉음 사이로 경주용 발주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경주용 발주기 핵심부품 국산화에 성공한 한국마사회(회장 김광원) 발주전문위원의 막바지 테스트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 곳에서 19년간 경주마 발주현장을 지켜온 고진형(44) 발주수석위원을 만났다.

◇발주란 무엇인가?

발주(發走)는 경마에서 한 경주가 시작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사람끼리 겨루는 100m 육상경기의 시작과 비교해보자. 세계정상급 육상선수들의 스타트 반응속도는 대략 0.15초 내지 0.2초다.

경주마의 속도도 이와 비슷해 발주기 문이 열리면 0.15초 안팎으로 경주마들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단연 경주마의 주행속도는 육상 스프린터의 속도(시속 40km)를 능가해 출발 이후 400m 후엔 시속 60km에 이른다. 100분의 1초를 다투는 육상종목 이상으로 경마의 발주는 경주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비정상적으로 발주한 말은 가속력을 배가하는 초반 400m 구간에서 뒤처지게 되며, 특히 1000m와 같은 단거리 경주에서는 역전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

고진형 발주수석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발주는 경주마에게 '같은 조건에서 뛸 수 있도록 형평성을 부여하는 기술'이다.

◇이색직업, 발주전문위원

고진형 위원은 1990년 5월 마사회에 입사했다. 이공계통을 전공한 고 위원의 첫 근무지는 서울경마과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발주와 인연을 맺을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발주와의 인연은 우연처럼 찾아왔다. 제주경마공원 개장으로 제주에서 일하게 된 고 위원에게 상사가 인원이 부족하니 '몇 달간'만 발주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몇 달간'이 19년이 됐다. 처음 발주현업에 배치됐을 때는 적잖이 당황도 했었지만 정상발주의 확률을 높이는 것은 결국 데이터 축적과 분석의 힘이라고 믿고 있는 그다.

발주기 진입을 거부하거나 요동치는 마필을 흔히 악벽마라 하는데 그는 경주마의 악벽유형에 따라 대응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 경주를 동영상화해 분석한 결과, 200가지가 넘는 진입거부 유형을 크게 4가지형으로 나눠 대응방법을 고안해냈다. 또한 악벽마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유명(?)' 악벽마의 이력을 정리하는 방법도 쓰고 있다.

◇발주기 국산화 성공, 어떻게 이루어졌나?

발주현장에서 악벽마와 씨름하던 그에게 국산발주기 제작의 꿈을 꾸게 한 계기가 있었다.

1996년 5월19일 제주경마공원 평소와 같이 발주현장에 있던 그에게 잊지 못할 사고가 생겼다. 경주는 시작됐으나 발주기가 오작동해 한 경주마가 들어가 있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었다.

'5번마'.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는 닫혀있던 경주마의 마번을 기억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건 그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고로 우수발주기 제작에 대한 마사회의 관심과 투자가 이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경마 발주기는 단순해보이지만 고도로 정밀한 기계장치로 제작이 까다로워 지금까지 수십억 원이 넘는 고가의 일본산 발주기를 운용해왔다.

이번에 개발한 국산 발주기는 전자제어방식이며 제작비용은 6억7000만원으로 일본산 발주기 가격의 30%정도에 불과하다.

◇'국산화에 머물지 않을 것', 해외 수출의지 밝혀

고진형 수석위원의 관심사는 오직 경주마와 발주 뿐이다. 현재 제주에 가족을 두고 과천에서 때 아닌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다.

가족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몰려오지만 그러기도 잠시, 하루일과가 경주마 분석과 발주기 제작일정으로 빼곡하다. 개인적인 꿈을 묻는 질문에도 발주기 이야기다.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발주위원이 제작한 최초의 발주기'라는 업적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국내소요 전량이 국산화되고 나면 전세계 120여 경마시행국을 상대로 우수 국산발주기를 수출하게 싶다는 포부를 남긴다.

우연히 접하게 된 발주현장에 영원히 남기를 선택한 고 수석위원, 오늘도 정상발주 100%를 위해 경주로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