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푸틴과 권위주의 체제의 미래

우민화와 각성의 힘

2023-03-20     김태현 기자
CNN의 트위터 계정 @mchancecnn에 제보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집무실 (사진 출처 = 트위터 @mchancecnn)

[뉴스인] 김태현 기자 = 소련 몰락 후 2000년대 초반 조지아의 시위대는 장미를 들고 독재자였던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퇴진 운동에 나섰다. 구 소련 국가에서 일어난 최초의 색깔 혁명이자 유일하게 러시아 영향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성공시킨 혁명이라 평할 수 있는 이 장미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오렌지혁명이,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튤립혁명이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는 벨벳혁명이 연쇄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와 같은 혁명을 색깔 혁명이라 부르는데, 색깔 혁명은 시민들이 같은 색깔의 옷을 입거나 특정 꽃을 들고 등장한 데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후 구 소련 국가를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의 공산주의 국가로 번져 갔으며, 최근에는 중국에서 지나친 코로나 봉쇄에 반대하며 시진핑 정권에 반기를 든 백지혁명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15개 구소련 국가 중 지금 러시아와 전쟁 혹은 분쟁 중인 우크라이나, 조지아 그리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인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8개 CIS(독립국가연합)는 여전히 러시아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밀접한 협력 및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이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이 지역 맹주로서 러시아의 지위는 여전하다.

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러우 전쟁을 보며 ‘포스트 푸틴’에 대해 고민해봤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의 러시아는 푸틴이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영원히 살 수 없는 푸틴을 대신해 ‘푸틴 시대’에서 ‘포스트 푸틴’ 시대로의 전환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러시아의 차르 푸틴은 당장 내년에 있을 총선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고, 이를 계기로 영구 집권을 공고히 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특히 이번 전쟁을 계기로 푸틴은 러시아내 중고등 학교에서의 군사 교육을 공식화했고, 중국과의 밀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는 곧 푸틴의 러시아가 군국화의 길로 더욱 가까이 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권위주의 및 전체주의 체제 국가들과의 단결을 통해 정치 경제적으로 서방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신냉전은 비단 민주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들 블록 간의 교류 및 교역 단절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들은 이미 내수만으로도 자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공공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내수 시장 확대를 공식화하며 서구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예전 냉전 시대의 ‘철의 장막’이나 ‘죽의 장막’이 재현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푸틴은 왜 이렇게 시대에 역행하는 선택을 내리는 걸까? 그리고 서구에 날을 세우는 권위주의 체제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선 그 자신감의 원천은 막대한 자원에 있다. 전쟁 중인 와중에도 푸틴의 러시아는 아프리카의 자원 부국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을 장악했다. 러시아 용병 집단인 와그너 그룹은 인정사정 안 가리고 반군들을 척결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서구 진영은 신재생 에너지 개발을 가속화 하며 러시아와 아랍을 비롯한 권위주의 자원 부국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가까운 미래에 달성 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자원을 무기 삼아 이란은 물론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포섭하며 반미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그 사이에서 전략적 애매모호성을 취하며 싼 값에 이들 나라의 원유를 사들이는 실리를 취하고 있다.

두 번째 자신감의 원천은 인구이다. 러시아는 인구 위기에 봉착해 있고, 중국의 인구 역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아랍, 힌디 등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아마도 10여년 후면 이들 국가들의 인구가 서방 국가 인구를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쉽게 말해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문화를 지닌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 문화권의 인구가 그리스도교 문화권까지 잠식해 결국 세계는 물론 한 국가의 인구 지도에서도 절대 다수를 점하는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자신감의 원천은 내수 시장의 성장이다.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 자원 경제를 중장기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의 고급 인력들을 비싼 돈에 유치함은 물론 호시탐탐 서방의 빈틈을 노리며 불법적인 기술 탈취를 획책하고 있다.

인구가 늘면 당연히 소비가 늘고,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일자리들 역시 증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이는 내수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져 이들 국가들의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실에 맞닥뜨리게 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권위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이들 국가의 문화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가 자유와 인권 그리고 개성이 보장되고 존중받는 사회보다 안전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문화적 상대성을 거부하거나 문화의 다양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그 어떤 이념이나 도그마보다 우선하는 것은 인권과 생명권에 대한 존중이며, 자유와 기회 균등의 원칙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권위주의적이고 봉건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원칙이 무시되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이들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이나 정의가 아닌 억압적인 법과 교조주의이며, 국민 대다수에게 이양된 권력이 아닌 극소수 엘리층에게만 집중된 절대 권력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권력이 다수에게 분산된다. 하지만 권위주의 사회에서 한정된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언제나 극소수의 지배 계층이다. 단적으로 러시아에서는 이와 같은 푸틴의 이너서클인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 집단, 이른바 ‘실로비키(Силовики)’들이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권력의 요직을 점하며 러시아 국부의 막대한 지분을 장악하고 있다. 비단 러시아 뿐 아니라 이들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에서는 끝 모를 부정 부패는 물론이고, 출처와 용처를 알 수 없는 블랙머니들이 국민의 복지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재 집단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에만 쓰여지며, 막대한 양의 국부가 이들의 미래를 위해 해외 비밀 계좌들에 공공연하게 은닉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사회에서 권력자의 시녀나 종이 되어 살기를 바라는 일반인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납부한 세금이 오직 이들 엘리트 권력층의 영달을 위해 쓰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올바로 바뀌지 않고, 이들의 기득권은 오히려 갈수록 더 공고해지는 것일까?

러시아의 예를 들자면, 러시아에서는 교육, 의료 서비스 등이 무료다. 가스비는 없고, 기름 값도 싸며, 대중 교통 요금 역시 저렴하다. 하지만 모든 기반 시설과 편의 서비스는 모두 수도인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 간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교육, 의료 등이 공짜라고는 하지만 양질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 교습을 위해 추가적인 지출을 해야 하거나 뒷돈을 내고 길게 늘어선 대기 번호의 앞자리를 사야 한다. 일반적인 장바구니 물가는 상대적으로 싸지만 질은 매우 떨어지며, 품질 좋은 물건이나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 집세나 외식비 역시 비슷한 경제 규모의 국가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싸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비싸다. 연금 수령은 60세부터 가능한데, 러시아의 평균 수명은 65세이며, 연금 수령액마저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0여만 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급여 수준이 가장 높은 수도 모스크바의 평균 급여는 한국 돈으로 120만원 수준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눈꼽 만큼도 없지만, 러시아의 사회주의 체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자본주의보다도 더 지독하고 악랄하게 과두 집단만을 위한 자본주의이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지상 낙원은 빚 좋은 개살구다. 문제는 지방에 거주하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대도시의 엘리트들은 이미 서구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러시아의 취약점을 직시하고 있다. 소수 권력층이 적당한 수준의 당근을 제시하고 자신들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며 국민들을 길들이고, 우민화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우민화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지속적인 선전 선동과 세뇌 교육 그리고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를 길들이고 감정을 지배한다. 일종의 집단 가스라이팅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조주의와 집단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주저하거나 혹은 무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나 인간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주입된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내세우는 지배 논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 의지를 지닌 독립적인 인격체라기보다 소모적인 부품처럼 기계화된 로봇에 가깝다. 지배 세력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우민화해 자신과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와 민족 혹은 종파에 대한 충성인 것처럼 포장하고, 실상 국가나 국민이 아닌 자신들을 위해 치러진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치장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착취와 세뇌의 연쇄 사슬에 끊임없이 동조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성이다. 그리고 각성은 진심어린 참회와 이성적 사고 그리고 측은지심으로부터 발원한다. 진심어린 참회와 이성적 사고는 주관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사회는 극도로 위험해지는데, 측은지심은 일반인은 물론 권력을 쥔 사람들이 반드시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갈등이나 폭압을 예방할 수 있고,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러시아인들의 기질을 설명하자면, 이들은 고집이 세고 자신들의 잘못을 웬만해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오만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는 비단 러시아인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집단 교리인 중화사상이 지배하는 중국이나 터키, 아랍처럼 교조주의적 원리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권 국가 출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그래서 이들 국가 출신 사람들과 특정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결론이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끝없는 평행선을 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한 상대의 주장이나 요구를 절대 수긍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거나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식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과 권위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입된 편향적 가치관과 사상이며, 이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작동하는 기계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자유로운 사고나 창조적인 발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보다 특정하게 코딩된 로봇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각성이다. 억압과 강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자유가 보장되고 개성이 꽃피는 세상을 원한다면, 소수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지배 논리가 아닌 다수의 생명권이 보장되고 인권에 대한 존중이 지배 가치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면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우민화의 굴레를 떨쳐 내고 주체적으로 각성해서 권력이 아닌 나와 가족과 평범한 이웃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