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에 나선 김영옥평화센터 한우성 이사장

[뉴스인] 김동석 기자 = 지난 18일 수원야구장에서 KT위즈 대 한화이글스 경기가 열렸다. 이번 경기는 KT위즈 경기에 앞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국영웅 김영옥 대령의 업적과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뜻깊은 시구가 진행됐다. 시구에는 사단법인 김영옥평화센터 한우성 이사장이 나섰다.

김영옥 대령(1919-2005)은 독립운동가 아들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미 육군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 유럽전선에서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불패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이탈리아 로마‧피사 및 프랑스 브뤼에르‧비퐁뗀느 해방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1946년), 프랑스 최고무공훈장(2002년)을 받았다.

종전 후 성공적 사업가로 변신했으나, 부모의 나라에서 6.25전쟁이 터지자 미 육군에 자원 재입대 했다. 유럽에서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일궜던 불패신화를 한국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재현하면서 중부전선 60km 북상의 주역이 됐다. 이 공로로 2005년 한국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영옥은 미군 역사상 최초 유색인 야전대대장의 주인공이다. 미국사회에서 평등의 확산과 미군에서 유색인 지휘관의 등장은 연관이 깊다. 미군에서 유색인 야전중대장은 2차대전에서 처음 나왔으며, 유색인 야전대대장은 6.25 때 김영옥이 처음이었다. 유색인 야전연대장은 월남전에서 처음 나왔다.

김영옥은 6.25전쟁 당시 18개월간(1951년3월-1952년8월) 최전선에서 싸우면서도 약 500명의 전쟁고아를 돌봤다. 김영옥이 이끌던 미 육군 31연대 1대대는 6.25 때 최전선에서 싸우던 부대로서는 후방의 고아원 하나를 통째로 돌봤던 유엔군 유일한 부대였다.

1951년 6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6.25가 군사적 전쟁에서 정치적 전쟁으로 변모해가자 김영옥은 이듬해 초가을 한국을 떠났다.

그는 1963-65년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와서 한국방어계획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청와대 경비부대와 수도방어사령부를 재편했으며, 유엔군사령관을 설득해 국군 최초의 미사일부대인 호크 미사일대대와 나이키 미사일대대를 창설했다. 두 부대는 오늘날 육군 미사일사령부와 공군 유도탄사령부로 발전했다.

김영옥이 31년의 군생활을 뒤로 하고 1972년 대령으로 예편하자 미국 정‧재계는 전설적 전쟁영웅이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를 영입하려고 러브콜을 보냈으나 그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정폭력피해여성ㆍ장애우ㆍ노인ㆍ청소년ㆍ입양아ㆍ빈민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33년의 여생을 바쳤다.

사단법인 김영옥 평화센터는 김영옥 대령이 남긴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목적으로 2015년 1월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이번 호국보훈의 달 KT위즈 시구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국가 리더십에 대한 김영옥 대령의 정의를 알리고자 했다.

그의 리더십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결연한 의지의 결합체이며, 국가지도자나 국민이나 정확한 비전을 세우고 난관이 있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 의지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옥평화센터 한우성 이사장은 "올해 상명대학과 경북과학대학 등 2곳에서 김영옥 대령의 삶과 리더십을 정규강좌로 개설했을 만큼 김영옥 대령은 국군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리더십의 상징이 됐다"면서 "‘나도 김영옥 대령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갖는 우리 젊은이들을 많이 만들자는 취지가 이번 시구의 큰 목적"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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