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했던 패션쇼, 알고 보니…무대 뒷이야기

지난 2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고려시대 윤관 장군 복장을 한 윤응철 파주시의원(왼쪽에서 앞줄 두 번째)과 공연을 기획한 이순화 패션디자이너(오른쪽에서 앞줄 세 번째), 그리고 무대에 오른 이현재 의원(가운데), 박영선 의원(오른쪽에서 앞줄 두 번째)이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인] 박소혜 기자 = 분단의 역사가 새겨진 남북 접경지역 경기도 파주에서 평화의 희망을 싹 틔우는 패션쇼가 열렸다.

지난 2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펼쳐진 이번 패션쇼는 전문모델 70여 명을 비롯해 현직 국회의원들과 지역 주민 등 100여 명이 대거 무대에 오르며 파주의 역사를 삼국시대부터 조선과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친 현대사까지 한눈에 보여주는 무대였다.

지난 2일 저녁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된 패션쇼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자 무대 위의 조명이 빛을 발하며 색색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우리 전통복식 한복을 기품 있게 비춰줬다.

바람의 언덕에서 흐르는 자연풍광은 이 같은 한복의 멋스러움과 패션에 담긴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됐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빛나는 무대가 펼쳐진 것은 그러나 놀랍게도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만들어진 것이다.

지난 2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패션쇼 무대가 설치되고 있다.

지난 30년 간 국내외 각종 무대에서 패션쇼를 기획하며 진행해온 이순화 패션디자이너는 “사실 공연 자체는 너무나 짧은 기간에 급조된 것이나 다름없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라면서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기획된 패션쇼지만 내 평생 가장 놀라운 감동이 있는 아름다운 무대였다”고 말했다.

파주 패션쇼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30년 패션 디자이너거장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뒷얘기를 9일 들어봤다.

지난 2일 파주 패션쇼 현장에서 무대를 만들고 있는 파주 시민들

우선 이번 패션쇼가 기획된 것은 순전히 파주를 고향으로 둔 선후배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지난 4월 이순화 디자이너가 고향인 파주를 찾았다가 파주에 깃든 오랜 역사와 흔적들을 듣게 된 것이다. 고향을 떠나 지내온 지 수십 년 만에 새롭게 되새기게 된 이야기였다. 이 자리에는 역시 파주에서 나고 자란 파주시의회 윤응철 의원이 있었고, 윤 의원은 삼국시대를 거쳐 근현대사를 거치며 임진강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였던 역사, 그리고 6.25 전쟁을 거쳐 분단의 상징이자 남북 접경지대로서의 지역성 등을 이어서 설명했다.

이에 파주에서 ‘평화의 희망을 싹 틔우는’ 패션쇼를 올리자는 얘기가 나왔고, 6월 호국보훈의 달에 맞춰 무대를 열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제는 6월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데다 그 어떤 후원이나 지원도 받을 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해보자는 의지는 결연했고, 곧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윤응철 의원은 “5월 10일 대선 끝나고 움직였으니까 실제로는 거의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에 이 모든 패션쇼를 만들어낸 것이다. 공연의 의미를 되새겨 반드시 이번에 꼭 파주에서 이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싶었고 파주 주민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누구의 후원이나 지원 없이 파주 시민들의 재능기부로 이 모든 행사를 치러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패션쇼 무대에 앞서 주민들이 연못을 연결하는 다리를 설치하고 있다.

‘파주사람들’로 이뤄진 파주 주민들은 파주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번 패션쇼를 위해 필요한 인력들을 자발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일꾼을 불렀고, 식사 준비도 서로 나누어 맡았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주민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패션쇼 당일 아침까지 무대를 짜고 못질을 하고 연못 위에 무대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며 런웨이를 만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전문가가 아닌 지역주민들의 대가없는 재능기부로 이뤄졌다.

이순화 씨는 “사실 패션쇼 당일이 다가오면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어서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심지어 당일 아침까지 무대가 준비되지 않았고, 리허설 시간에도 무대에서 조명을 설치하고 있었다. 기획의 부재라고 한다면 정말 졸속이어서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끝까지 이 일을 해내기 위해 한마음을 모은 파주 시민들의 모습을 보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지난 2일 파주 패션쇼 리허설이 열리기 전 무대가 아직 설치되지 않은 모습이다.

패션쇼 무대는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밤 9시 모든 행사가 아무런 무리 없이 끝났다. 그리고 공연의 막이 내려진 뒤, 다시 한 번 감동의 무대가 펼쳐졌다. 그 다음날 다른 행사 때문에 패션쇼에 사용됐던 무대를 밤사이 철거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윤응철 의원은 패션쇼가 끝난 뒤 무대를 철거하고 마무리하는 이 과정을 ‘바보8인방’의 감동적인 무대라고 칭했다.

윤 의원은 “이들은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모두가 떠난 공연 현장에서 밤새 무대를 철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이런 행사 준비는 해 본 적도 없는 주민들이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나서서 마무리를 도왔다. 밤새 펼쳐진 이들의 노력은 또 하나의 감동의 무대였다. 준비 기간도 짧았고 그 어떤 지원이 없었다는 큰 문제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을 보고서 우리가 뭔가를 해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 2일 밤 패션쇼 무대가 끝난 뒤 주민들이 밤새 무대를 철거하고 있다.

이번 파주 패션쇼를 시작으로 이들은 올 가을 국회에서의 무대, 그리고 해외에서의 무대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번처럼 짧은 시간에 주민들의 재능기부로 똘똘 뭉친 감동의 무대를 볼 순 없겠지만, 파주의 무대가 ‘평화의 희망’을 놓는 시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주 주민들의 이번 무대는 지역의 역사성을 처음으로 드러내게 됐다는 자부심이 담긴 자리이자 분단의 상징 지역으로서의 한을 풀어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파주에서 심은 평화의 싹이 어떻게 펼쳐질지 다음 무대에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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