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탈북 10년차,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씨

[뉴스인] 박소혜 기자 =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북한의 핵실험은 그나마 있던 관계 호전 가능성도 가라앉혔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북한 내부는 어떤 상황일까. 탈북민에게 들어본 북한은 이미 시장경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자본주의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대북확성기를 통해서가 아니라도 이미 한국의 문화는 북녘 땅 곳곳에 퍼져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성진 씨가 북한을 파고든 한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민경찬 기자)

북한에서 익힌 국악기 ‘소해금’으로 한국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연주자 박성진 씨(45)를 서울 종로구 뉴스인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박 씨의 탈북에는 한류 영향도 있었다.

“북한 고위층의 딸 결혼식이 있어서 유행하던 노래를 축가로 불렀어요. 그런데 다음날 감옥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죠. 제가 부른 노래가 ‘칠갑산’이었거든요. 모두들 따라 부르고 좋아했는데 그만.”

허리도 펼 수 없는 독방에서 40일을 감금당한 뒤 대중가요를 부르지 않겠다는 확약을 하고서 박 씨는 황해도 광산으로 보내졌다. 1993년 당시 그곳으로 날아온 대북전단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지만 선전대에 복귀해 군 생활을 했다. 그때는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나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같은 노래들을 불렀다고 했다.

이후 박 씨는 경상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아버지 이력 때문에 장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가족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2003년 당시 북한에서 한달 평균 월급이 1000원 정도인데, 탈북을 하려면 가족 1명당 브로커에게 건넬 북한돈 2만원이 필요했어요. 자금을 마련해 모두 8명이 탈북길에 올랐죠.”

박성진 씨는 2004년 탈북해 2005년 한국에 들어왔다. 가족이 함께 국경을 넘던 중 끝까지 함께 못온 맏누이는 이후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막내누이는 아직 북에 남아있는 상태다.

◇ 북한 파고든 한류, 지도층도 지방주민도 예외 없어

북한에서 한류는 언제부터 전달된 것일까. 박 씨는 “90년대 경제난 이후 한류가 엄청나게 들어왔다. 트로트는 들어본 적 없는 장르인데다 사랑을 노래한 가사가 새로워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한국음악을 듣지 말라고 해도 막을 수가 없다. 한국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돌리기 위해 북한정권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전선동 도구인 악단에 한류를 차용했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치마가 무릎 위에 올라오면 단속하면서 북한판 소녀시대인 모란봉 악단은 무대에서의 파격을 더했다.

지도층 역시 한류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박 씨는 “당 간부들의 차를 타면 한국노래가 테이프에서 흘러 나왔다. 친구 아버지가 보위사령부에 있었는데, 그 집 창고를 가보면 주민들에게 회수한 한국영화와 미국영화 등이 쌓여 있었다. 단속한 영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들끼리 돌려보는 것”이라고 했다.  

서로 감시하고 신고하는 체계도 거의 무너진 상태다. 한국음악과 영상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장마당에서 거래가 오갔다. 1980년대만 해도 물질보다는 충성이 더 중요했지만 1990년대 경제난이 오면서 돈이 가장 중요해졌고, 당에 고발한다고 보상이 있거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으니 신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양이 아닌 다른 지방 역시 마찬가지다. 박 씨는 “평양서 지내다 황해도 탄광으로 쫓겨 갔을 때 일이다. 동네 사람들이 TV 있는 집에 다 같이 모여서 한국영화를 본다. 전기가 없으니 자전거 바퀴에 발전기를 달아 열심히 돌린다. 힘 빠지면 TV 화면이 작아지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한류가 퍼진 건 똑같다”고 전했다.

◇ 북한의 자본주의, 경제난 겪은 ‘장마당 세대’가 이끌어

1990년대 학교를 못 다니고 부모 따라 장사하며 돈 벌어야 했던 소위 ‘장마당 세대’가 중추를 이루면서 북한에서도 낙후된 형태의 자본주의인 ‘장마당 경제’가 형성됐다.

“장마당에서 쌀을 팔면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닌데 가격이 전국적으로 동일해요. 만일 북한정부가 쌀 가격을 잡겠다며 강제로 내리면 장사꾼들이 쌀을 안 내놓고, 개인 간 거래가 이뤄지면서 원래 가격대로 오르는 거죠. 쌀이 충분히 수확되지도 않고 북한 정부가 쌀을 파는 것도 아니지만 장마당에 쌀은 잔뜩 쌓여 있어요. 부족하지 않아요. 오직 나라가 통제할 때만 쌀이 없습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경제난과 남한의 한류는 현재의 탈북문화를 만들었다. 최근엔 북한에서도 ‘가족들이 한국에 있다’고 하면 대접을 받는 상황까지 생겼다고 했다.

박성진 씨는 “예전엔 재일교포 귀국자들이 잘 살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한국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을 선망할 정도로 인식이 달라졌다. 선 볼 때도 몸값이 올라간다. 한국에서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돈을 보내기도 하고, 한국으로 올 기회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성진 씨가 북한에서 해금을 개량해 만든 현악기 '소해금'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민경찬 기자)

◇ 2천만 북한 주민 끌어안을 ‘문화 통일’ 우선돼야

박성진 씨는 11살 때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해 소해금을 전공했다. 소해금은 전통국악기 해금을 북한이 현대식으로 개량한 국보급 현악기로 해금과 바이올린의 중간 소리를 낸다.

“북한에서 예술학교는 인물심사를 거쳐 입학하는데, 악기도 학교에서 정해줬어요. 소해금은 여성들이 많이 하는 악기라 처음엔 싫어했죠. 하지만 9년 과정 동안 연습하면서 한 몸과 같아졌어요. 지금은 소해금으로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으니 잘 배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해금은 어느 악기와도 잘 조화되는 게 특징이다. 한국에서 가수 장윤정 노래에 삽입돼 함께 공연을 다녔고, 드라마 ‘동이’에서는 배경음악으로 연주했다. 지난 2010년에는 클래식곡을 연주한 ‘박성진 소해금 명곡집’ 음반도 냈다. 최근에는 해금 연주자 정다연 씨와 ‘해이락(奚二樂)’ 프로젝트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 명. 이들은 ‘먼저 온 통일’로 불린다. 남북 주민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 미리 시험해보는 대상이기도 하다. 박성진 씨는 문화적 통일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아직 3만 명 탈북민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준비도 안 돼 있는데, 북한 주민 2000만 명을 끌어안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 생각해야 해요. 70년간 분리돼 있었으니 같은 말을 써도 의미가 안 통할 때가 있죠. 서로 이해가 필요합니다. 탈북민들도 남한에서 무시당한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북한에서도 그런 건 마찬가지에요. 어느 세상이나 사람 사는 건 똑같죠.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해소하는 노력이 있어야 서로 덜 아프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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