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헬스】고선윤 논설위원 =  아버지는 딸을 위한 시를 썼고, 딸은 아버지를 기리며 책을 엮었다.

아버지는 1984년 유명을 달리한 최세훈 아나운서다. 그는 KBS와 MBC에서 일했으며 자유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딸 철미는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활약하면서 부지런히 시와 수필을 발표하는 작가다.

최철미는 아버지의 시와 수필, 가족의 글 그리고 본인의 글을 담은 가족 문집 <아빠, 아버지>(도서출판 영문)를 출간했다. 그리고 6월 셋째 주 일요일, 서울의 작은 찻집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이날이 미국에서는 아버지의 날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30년이 지난 자리였지만, 아버지 최세훈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백발 노신사들의 추억 속 시간은 날개를 달고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제가 진행을 하겠습니다. 제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겠습니다”는 야무지고 차랑차랑한 철미의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했고 아버지의 시를 여러 분들이 나누어서 낭독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행사는 진행되었다.

철미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차인태 아나운서는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 중계를 맡았는데 텔레비전으로 이것을 지켜본 최세훈 아나운서는 바로 ‘보았다/울었다/감격했다’는 전보를 띄웠다. 철미는 전보를 받은 기억이 있냐고 질문했고, 차인태 아나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을 더하면서 기억한다고 답했다. 전화로 전보를 띄우는 그 자리에 ‘초등학교 3학년인 내가 있었다’는 철미에게 차인태 아나운서는 아버지의 지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도 분명히 자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철미는 “정연호 아나운서는 나에게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쳐준 사람입니다”라는 말로 그를 소개했다. 문화방송 아나운서실 야유회를 따라간 4살 여자아이는 막내 아나운서에게 맡겨진 모양이다. “넌 오늘 내 파트너야.” “파트너가 뭐에요?” “응, 짝꿍이라는 거지.” 이런 대화를 기억하면서 칠팔십 어르신들이 아버지만의 지인이 아니라 딸 철미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방송국 공채에 응시했다가 최세훈 아나운서에게 밀려 법조인을 길을 걷게 되었다는 한승헌 변호사는 아버지를 기리면 출판기념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철미의 멘토이자 조언자로서 큰 힘이 되었다. 
 

▲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철미씨.

내가 최철미를 만난 것은 1984년 관악 캠퍼스다. 훤한 이마에 투박한 뿔테 너머 반짝이는 눈동자를 기억한다. 놀기 바빴던 나에게 철미의 노트는 교과서이자 참고서였다. 항상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깊은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철미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대학교 1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고맙게도 시인이 되어 나타나 나를 찾아주었다.

오랜 시간 풍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고 손을 만지고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우리의 긴 공백은 신앙과 문학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무장한 철미가 엮은 <아빠, 아버지>가 메우고 설명하고 또 메운다. 순탄하지 못했던 가족 이야기 속에 “밤마다 죽음을 꿈꾸는 나에게 의사가 내린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구절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그래도 나는 부럽다 “능금/따 먹고 싶었다/나의 씨……, 나의 아씨”라고 시작해서 “철미야/내 새끼”라고 마무리 하는 시 ‘철미’를 읊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시던/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시던/소리 없이 조용히 기도하시던/내겐 가장 그리운 분”이라고 표현하고 “내가 다시 태어나도/다시 이렇게 부르고 싶은 분/아빠, 아버지”라는 글을 쓸 수 있는 부녀가 부럽다.

남의 집 잔치에 와서 웃고 울면서 중학교 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돌아가시고 몇 해나 되었나? 아버지의 지인 중 내가 찾아뵐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될까?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철미는 문집의 헌사(獻辭)에 "아버지대의 방황과 어두움이, 저희 대에 이르러서는 찬미와 빛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무언(無言)의 유언을 지금 저희는 이루고 있다"고 당당하게 기술하고 있다. 훌륭하다. 부럽다. 내 친구 최철미! 나도 이제 아버지의 ‘무언의 유언’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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