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가 다녀간 걸까? 커튼을 걷자 온 세상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눈이 부시다. 이것이 벚나무고 저것도 벚나무라는 사실을 어젯밤까지는 몰랐었다. 꽃봉오리 무겁다고 응석을 부리면서 축 늘어진 수양벚나무가지가 4월을 맞이하고 봄의 한가운데에 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벚꽃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벚꽃축제니 벚꽃구경이니 하면서 벚꽃명소를 알리는 글들이 SNS를 메우고 전문가 못지않은 사진들을 올린다. 나 역시 양재천길 하늘을 메운 벚나무 작은 꽃들의 재잘거림에 흥분하다 못해 머리가 혼미해진다. 그래도 그들의 수다가 궁금해서 고개를 쳐들고 눈을 살짝 감아보기도 한다. 희한하게도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는 게 있다. 

“참 좋다!” “예쁘다!” 말하고 싶은데 어째 뒤가 켕긴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자란 내가 지금도 일본문학을 공부하니 어쩌니 하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면 혼날 것 같다. 이렇게 뭔가 버젓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주눅이 드는 것은 생뚱맞고 어리석은 짓일 거다. 그래도 소리 내서 말하기는 두렵다. 예전에 비해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혹 ‘벚꽃축제는 매국적 행위’라 주장하는 단체가 있고, 벚꽃 놀이는 문화회유 정책에서 비롯된 매국적 놀이라면서 우리나라를 뒤덮는 벚꽃을 보고 통탄한다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가 아니다. 일본에는 법정 국화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천황가의 꽃은 불로장수를 상징하는 국화(菊)다. 그래도 벚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위대, 경찰의 계급장이나 휘장은 벚꽃 문양이다. 100엔 주화에도 벚꽃이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선생님이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도 벚꽃 디자인이었다.
 
메이지 이후 일본정신을 벚꽃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국학자들의 대두와 더불어 꽃이 많이 피고 성장이 빠른 벚나무 ‘소메이요시노’ 식수를 권장하면서 벚꽃은 근대일본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일본인의 벚꽃 사랑은 메이지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긴 역사를 가진다. 한해 농사를 시작할 무렵 꽃을 피우니 곡물의 신이 머무는 나무라고 신성화했으며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는 지표로 삼기도 했다. 벚꽃의 일본말 ‘사쿠라’는 일본 먼 신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삼종신기를 지니고 하늘에서 내려와 맞이한 부인의 이름이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木花咲耶姫)’이다. 이 이름은 벚꽃이 피는 것처럼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10세기 초 견당사 폐지를 전후로 일본 독자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는 꽃이라고 하면 바로 ‘벚꽃’을 의미했다. 그 이전에는 매화였던 모양인데, 여하튼 이후 일본 시가(詩歌)에 등장하는 꽃은 바로 벚꽃을 말한다.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에 걸친 전국난세, 천하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무대 뒤에서 무사의 딸로서 그리고 무사의 아내로서 죽음을 선택한 호소가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 1563~1600)의 사세구 ‘져야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 되고/ 사람도 사람이 된다(散りぬべき時知りてこそ世の中の花も花なれ人も人なれ)’의 꽃 역시 벚꽃이다.  

일본 속담에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라는 말이 있다. 꽃 중에서는 벚꽃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 중에서는 무사가 첫째라는 거다. 순식간에 폈다가 순식간에 지는 벚꽃처럼 죽음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정결하게 마무리하는 무사가 가장 훌륭하다는 뜻이다.

일본 기상청은 친절도 하다. 매년 3∼5월에는 벚꽃의 개화시기를 알리는 '사쿠라전선'을 발표한다. 길게 드러누운 일본열도의 남단에서 북단까지 벚꽃의 개화 예상도는 마치 장마전선도를 연상케 한다. 우리 동네 벚나무는 언제 꽃을 피울 것인가 궁금해 하면서, 일기예보를 보고 소풍날 정하듯 사쿠라전선을 확인하고 꽃구경 날을 정한다. 우리와 달리 4월에 새 학기를 맞이하는 일본은 한 학기 시작을, 1년의 시작을 4월에 한다. 그러니 꽃구경은 단순히 꽃을 보기 위한 자리만은 아니다. 가족, 친구, 동료가 자리를 깔고 술을 한잔 기울이면서 단합하고 응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4월 서울의 하늘은 벚꽃으로 가득하다. 도쿄의 하늘도 벚꽃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슬픈 근대사를 기억하면서 꽃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만, 아니 어쩌면 지난 시간의 이야기 같은 건 잊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봄은 봄이다. 봄은 참 좋다.

저작권자 © 뉴스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