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딸이다. 엄마도 큰딸이기 때문에 외가 사촌들 사이에서는 대장이다. 바로 아래 동생과는 6살이나 차이가 나니 나의 위상은 상당하다. 때로는 이모 삼촌들이랑 같은 서열에 있는 착각을 할 때도 있다. 막내 이모가 나와 딱 10살 차이가 나는데, 젊은 엄마의 딸인 나를 질투했었다. 가방도 필통도 머리핀도 내 것을 탐내고, 힘으로 또는 감언으로 가져갔다.

1990년대 개인용 컴퓨터 PC가 급속히 보급되었다.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따르면 1984년 말 2000대였던 PC가 1992년 말 311만4000대로 늘어났다고 하니 8년 만에 무려 155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 수치는 바로 세상 변화의 속도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로 외가 식구들 중 세상 변화의 가장 앞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동생들의 연애 상담만이 아니라 삼촌의 비자금 상담까지 했으며 급기야 그 통장을 내가 보관하기도 했다. 

여하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의 자존감과 이어지면서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만하면서 우쭐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았다. 나의 행동에 실망할까, 솔선수범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몸을 아끼는 일은 없었다.

29살,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2남2녀 막내에게 시집을 갔으니 나는 막내며느리다. 시어른들도 어렵지만 큰시누가 나보다 12살 위 띠동갑이니 ‘언니’가 아닌 ‘형님’이라는 호칭이 쉽게 나왔다. 동서와는 2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일찍 결혼해서 살림을 맡아온 큰집 며느리인지라, 정신연령으로 따진다면 10살은 더 차이가 나는 사람이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시댁에서 나는 철없고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며느리다. 뭘 해도 불안한 존재다. 나도 잘 하고 싶었다. 동서처럼 부추전을 얇게 굽고 싶었지만 태우기만 하면서 결국 제사상에는 오르지 않는 고구마전만 굽는 신세가 되었다. 동서가 나물을 삶고 무치는 동안 나는 뒤에서 멍하니 설거지거리만 기다린다. 차례 상을 차리는 일에 주인의식 없이 동참한다는 것은 참 재미없는 일이다. 어쩌면 앉을까 어쩌면 누울까 꾀만 난다.

명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집안 대소사에서도 막내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열외다. 사실 우리만 서울에 살다보니 거리적 요인이 크다. 그렇다고 그것만은 아니다. 우리 남편보다 4살 위인 형은 장남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역할을 십분 감수하고 있으며 동서 역시 완벽한 맏며느리다.

그러니 칭찬은 동서 몫이고 나는 항상 꾸지람의 대상이다. 조카들 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먹인다고 혼나고, 손님상에 알탕을 올렸다고 혼났다. 후리가케는 조미료 덩어리고, 알탕은 콜레스테롤 덩어리란다. 이렇게 뭘 해도 혼나는 게 일이다. 어머니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동서의 요리에 뿌려진 후리가케를 보고 어디서 살 수 있는 거냐고 물었고, 동서가 끓인 국에 생선 알이 들어있으니 더욱 맛있다면서 드신 것을 나는 기억한다.   

시어머니 생신이라고 동서가 모피코트를 선물했다. 엄청 비싸 보인다. 싱글벙글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동서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어머니 새벽기도 나가시는데 이제 걱정이 안 될 것 같아요.” “어머니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하고 화장품세트 내미는 손이 부끄러웠지만 막내며느리는 막내며느리의 역할이 있다.

“어머니 너무 예뻐요. 저도 한번 입어보게 벗어보세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막내며느리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지 “그래 너도 한번 걸쳐봐라”면서 벗으신다. 동서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 어머니의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 어차피 따라갈 수 없으니 이렇게 푼수 짓하고 웃는 게 막내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형님이 담근 김치가 세상에서 먹어본 김치 중 가장 맛있어요”하고 한포기 얻어오고, “형님이 굽는 전은 예술이에요”하면서 옆에서 입맛을 다신다.

명절 연휴가 끝나면 동네 아줌마들은 허리가 아프니 옆구리가 아프니 하면서 찜질방에 가자고 부른다. 여기선 어느 집 할 것 없이 시댁이야기다. 솔직히 자랑은 없고 흉만 있다. 이 중에서 단골메뉴는 싸가지 없는 동서 이야기다. 어쩜 저렇게 얄미울까 동조하면서 듣다보면 모두 내 이야기다. “그래도 형님보다 잘 하겠다고 나대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얄미운 아랫동서가 있어야 윗동서가 빛나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조심스레 말했다가 된통 혼났다.

찜질방 구석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의 책을 옆에 두고 자는 사람이 있다. 곁눈으로 슬쩍 읽어보니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거다.’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의 저서인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 이 책이나 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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