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길홍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
역대 정부는 재벌기업이 앞장서서 세계시장에서 돈을 벌어 성과급 등 임금인상, 고용, 시설 및 R&D 투자, 세금, 저소득층 복지 지원 등으로 서민에게 수익을 분배하는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수출지원정책, 감세정책 등 재벌위주정책을 시행해 왔다. 국민도 같은 마음으로 물가상승 등 서민 희생을 담보로 한 고환율 정책, 기업 감세 등 재벌에 대한 정책적 특혜를 암묵적으로 지지해 왔다.

하지만 재벌 수익금은 사내유보금으로 비축될 뿐 사회에 환원되지 않으며 현제 기업/개인 소득격차가 OECD 최고 수준이다. 한 언론사 조사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의 노동소득분배율(총부가가치에서 노동자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선진국의 60~70%에 비하여 10% 이상 낮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에 비하여 중소기업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의 인건비가 절반이 안 된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30대 재벌 그룹 취업자는 전체의 5%에 불과하다. 즉 우리나라는 기업 수익이 증가해도 노동자 소득은 증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한국 노동자의 권리보장과 행복지수, 즉 삶의 질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서민들은 현재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의 늪에 빠져 쓸 돈이 없어서 내수시장이 날로 침체되고 있다. 세수가 감소하자 최상위층 대상 자본소득세 등 직접세는 가만히 놔두고 담배세 등 서민 대상 간접세 인상, 연말정산 세액공제 축소 등 꼼수 서민 증세로 재정 적자를 메우려 한다. 서민경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다. 이제 정부ㆍ재벌이 서민에게 복지, 구제금융 등 적극적인 재정ㆍ통화ㆍ금융 정책으로 보답할 차례이다.

외환위기 시절 대부분 재벌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자산 대비 300%를 넘어서 부도 위기에 처했다. 삼성ㆍ현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김대중정부는 국민 세금으로 공적자금을, 서민들은 금붙이 등 쌈짓돈을 긴급 수혈하여 회생시켰다. 이렇게 원기를 회복한 재벌들은 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줄이고 외형을 몇 배로 성장시켰다.

이명박정부는 기업들의 수출증대를 위하여 인위적인 고환율정책을 시행하였는데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자 환율은 천정부지로 상승하였다. 기업들은 수출증대로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으나 서민들은 물가상승을 감수해야 했다. 유학생 부모들은 고환율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학비가 감당이 안 되어 눈물을 머금고 자식들을 중도에 귀국시켜야 하였다.

기업경영성과 평가기관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이명박정부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9%에 불과하였으나 재벌그룹 매출액은 삼성이 51.7%, 현대차가 76.2% 증가했다. 또 같은 기간 세액공제혜택은 삼성전자의 경우 6조7113억 원에 달하며 우리나라 전체 기업 세액공제금액의 16.7%를 차지하였다. 그 결과 삼성ㆍ현대차ㆍSKㆍLG 4대 그룹이 2013년 창출한 부가가치총액은 총 140조2000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9.71%를 차지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삼성ㆍ현대차 그룹의 매출액 합계는 2012년 476조원으로 GDP의 35%에 달하였다.

하지만 재벌은 수익금을 ‘사내 유보금’으로 비축하여 이자 놀이, 부동산 투자, 총수일가 부당 증여 등 자신들의 자산증식에만 몰두하였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삼성동 사거리 한전부지를 공시지가의 3배에 달하는 10조5000억 원에 인수하며 현대자동차 사옥, 현대백화점, 현대산업개발 사옥, 파크하이야트 호텔 등 현대가의 건물이 모여 있는 삼성동 사거리 일대의 부동산 시세가 급등하고 있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10대 그룹 상장사(금융사 제외)의 사내유보금은 537조8000억 원에 달하였다. 정부의 사내유보금 과세방침도 후퇴하였다.

재벌기업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하여 우리나라 전체 기업 중 99%를 차지하고 종업원 수도 88%에 달하는 중소기업의 성장동력도 고사시키고 있다. 중소기업은 경제성장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대기업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가 되어야 한다. 독일은 평생직장에서 연마한 장인(Meister)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중소기업들이 세계시장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유럽경제위기에도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서 무역수지 흑자가 세계 1위이다.

대기업들이 ‘슈퍼 갑'의 위치를 이용하여 중소기업 하청업체와 윈ㆍ윈이 아니라 착취적 거래와 문화로 일관하며 단가 후려치기, 대금결제지연, 핵심인력 스카우트를 통한 기술 빼가기 등 온갖 불공정 관행을 지속하면 성장잠재력이 시들게 된다. 또한 막대한 사내유보금이 세계 초일류기업을 위한 R&D 투자 대신 눈앞의 푼돈을 쫓아서 주로 자영업자와 구멍가게 등 골목상권과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문어발식 확장에 사용되면 서민 먹거리를 빼앗아서 내수가 더욱 침체된다. 요즈음은 영화도 보고 싶은 영화보다는 재벌에게 돈이 되거나 재벌이 보여주고 싶은 영화만 봐야 한다.

재벌기업은 성장을 위해서라면 편법, 탈법, 불법도 불사한다. 또 최소한의 지분으로 전 계열사에 지배적 경영권을 행사하고 기업의 자산을 소위 ‘오너 일가’의 개인재산처럼 유용하면서도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때로는 경영손실을 서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재벌들은 기업의 부를 ‘오너 일가’와 그 가신 등 극히 소수가 독점하기 위하여 상속세 탈세와 불법을 동원하며 경영권을 세습한다. 기업공개 후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므로 ‘오너 일가’의 개인재산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다. 경영권을 적법하게 세습하려면 기업공개를 안 해야 한다. 하시만 ‘오너 일가’들의 경제범죄는 ‘경제 살리기’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인재라는 명분하에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다.

‘낙수효과’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며 재벌들을 제도적ㆍ정책적ㆍ정신적으로 지원하였으나, 그들은 날로 비옥하고 건강해지고 나머지 경제주체들은 나날이 영양실조로 야위어 간다. 암세포가 처음에는 영양분을 독차지하며 암 덩어리를 급속히 키워나가지만 주변 세포들이 영양실조로 괴사하며 유기체적 공동체가 사망하면 같이 소멸된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면 소비가 위축되어 내수시장이 침체되고 경제성장률이 저하된다. 경제성장률 둔화는 소극적인 R&D 투자, 중국ㆍ인도의 약진, 엔저 확대, 세계적인 디플레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되며 더욱 심화되고 있다. 실제 2012년 경제성장률이 세계 순위 100위권인 2%까지 하락했다.

재벌기업들이 전쟁과 같은 세계시장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인 공로가 인정되지만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국가ㆍ국민적 후원과 함께 한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수익금을 그들이 독차지하며 부익부빈익빈만 심화시켰다. 이제 경제성장률 증가는 부익부빈익빈의 심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병리가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의 체감경기는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나쁘며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서민 자제들은 정부의 학자금 융자 재원이 한정되어 대부업체에서 30% 전후의 고금리 대출로 학비를 마련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는 이미 빚더미를 짊어지고 있다. 대기업 외의 경제주체들은 성장을 못하여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 대기업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공무원은 자리가 한정되어 있으며, 요식업 등 자영업은 시장포화가 한계를 넘어서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구조적 양극화의 벽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감방 갔다 오더라도 사기 치는 것 외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인 것은 결혼ㆍ출산ㆍ양육비용이 없기 때문이다. 명예퇴직한 장ㆍ노년층도 100세 시대에서 여생의 호구지책을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것 같다.

이제 정부ㆍ재벌이 약속한 ‘낙수효과’를 실천하여 먼 옛날 ‘국제시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되살릴 때이다.

먼저 정부가 중소기업과 서민을 위하여 적극적인 재정ㆍ통화ㆍ금융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즉 과거에 위기의 재벌에 그랬던 것처럼 공적자금의 긴급 수혈이다. 재원은 재벌 사내유보금과 자본소득세에 대한 세율인상이다. 또한, ‘양적 완화’도 고려해야 한다. 그 대상은 서민 복지와 개발제한구역 재산권 침해에 대한 보상이다. 저소득층으로 전락한 그린벨트 및 국립공원 거주민에 대하여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인 ‘사유재산권 보호’ 차원이며, ‘토지담보부채권’ 발행을 허용한 후 장기 저리로 매입하면 된다.

다음 재벌기업은 자본과 장인정신에 대한 수익의 공정한 배분을 제도적 관행으로 정착시켜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동반성장에 이바지해야 한다. 나아가서 고용, 시설 및 R&D 투자, 세계 초일류기업 성장, 수익 증대, 고용ㆍ투자 확대의 선순환 생태계의 창조를 통한 건강한 경제 펀더멘털을 구축하여 그 동안의 국민적 지지에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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